<칼럼> 교육,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사람이란 생각해 볼수록 신묘하고 영험한 동물입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진화했기에 만물의 영장으로 올라설 수 있었고, 또 어떻게 노력했으면 지금까지 그 위치를 지켜왔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들이 오죽했으면 ‘신은 자기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겠습니까. 사람이 신을 대신해서 만물을 지배하려는 ‘오만’의 이론적 배경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우주의 크기를 계산하고 그 깊이를 헤아리려는 인간은 참으로 ‘영묘한 존재’인 것은 사실 같습니다.
생명체에게는 ‘종족보존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질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칫, ‘당신의 삶이 종족보존의 본능을 빼놓고 다른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으로 들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종족보존 이외에도 많은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교육을 말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은, 넓은 의미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진화의 수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만,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글을 배우고 책을 읽습니다. 글을 배우는 것은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내가 요구되는 과정입니다. 글을 배운 즐거움은 대부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됩니다. 글은 소통의 도구입니다. 글을 통해서 우리들의 희로애락이 오고 갑니다. 글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전부가 아닙니다. 글을 통한 소통의 즐거움까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육을 뒤 돌아 봅시다. 유아원부터 대학까지, 한 20년쯤이 걸립니다. 거리로 따지면 사하라사막을 가로지르는 거리쯤 될 것입니다. 먼 사하라를 건너서 물가에 데려온 말들이 물을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교육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20여년을 학교에 다녔는데 글을 읽는 즐거움을 모르고 예술을 사랑할 줄을 모른다면 비극 아닙니까. 꽁보리밥을 먹은들 어떻습니까. 스스로 든든한 기쁨이 용솟음쳐야 합니다. 서점에서 좋은 시를 읽었는데, 책 살 돈은 없고, 옛사람은 그 자리에서 그 시를 외웠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시’를 가르칠 것이 아닙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을 가르쳐야 합니다. 음악의 즐거움을 가르치고, 수학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학문과 예술을 즐기는 방법이 별 것 있겠습니까. 학자나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학문과 예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 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스스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보다도 더 행복하고, ‘빈센트 반 고흐’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불행할 수 있어도 예술애호가는 행복합니다. 애호라는 그 자체가 커다란 축복인 셈입니다.
교육,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수요에 따라 교육과정과 교육의 내용은 바뀔 수가 있습니다. 교육은 내용보다도 방법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대학에서 섹스피어는 무엇하려고 가르치느냐’라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대학 시절 섹스피어를 배웠지만 사회에서 한 번도 써먹지 못했다며 그런 시간에 토플이나 더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 합니다. 섹스피어 강의를 듣기는 했지만 문학으로서 작품을 즐기지 못한 까닭 같습니다. 언어의 벽을 못 넘고, 작품 자체를 이해하지를 못하는 비극적인 한 현상입니다.
‘어륀지’로 시작 된 영어발음 논쟁이 우리 교육의 현실을 잘 말해 줍니다. 정부가 국회에 넘긴 한미 FTA 협상문안은 엉망이면서, ‘오렌지’냐 ‘어륀지’는 무슨 타령입니까. 영어, 알파벳을 가르친 후, 사전 찾는 법과 간단한 문법만 가르치고 책을 많이 읽게 해야 합니다. 회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표현이 미묘하고 어려운 전공 서적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중학교 수준의 영어 실력이면 외국여행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은 빼어나게 영어를 잘해야 합니다만, 모든 국민이 영어 회화를 유창하게 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음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더욱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뿐 아니라, 인류라는 종족에 속한 한 생명체로서, 또 한 개체로서의 자아를 실현하고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얘깁니까. 정치가들이 ‘수요자 중심’을 자주 들먹입니다만, 무슨 뜻으로 쓰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내용을 수요자의 입맛에 맞게 가르치라는 것입니까? 학문과 문화의 전수와 함께 개개인 스스로 가치를 높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서점에서 시를 그 자리에서 외웠다는 분은, 공주사범대학에 계셨던, 영문학자 유종호(1935- ,충북 진천)교수이십니다. 서정주 시인의 ‘풀리는 한강 가에서’라는 시가 1948년에 ‘신천지’에 실렸는데, 계산해보니, 교수님이 13세 때셨습니다. 잡지 살 형편은 못되고, 그 자리에서 외웠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시를 좋아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유종호 교수님처럼, 강력한 욕구가 생기도록 만드느냐가 교육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면, 2차방정식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2차방정식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은 스스로 우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택상/군산대학교 수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