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전보도 없이 왔다.’고 했습니다. 반가운 일이 예고 없이 갑자기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지난 늦가을, 겨울이 올 징조들을 봤을 때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그 때는 ‘아침에 일어나니,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었다.’라는 말이 떠올랐었습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사방에 오랑캐들이 삥 둘러싸고 있었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우리들에게 겨울이란 추위 속에 굶주리는 시련의 기간이었고, 봄은 풀뿌리라도 캐어먹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봄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보리가 다 익을 때까지를 기다리던, ‘보릿고개’를 넘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만물들은 생명을 계속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순환하기 위해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봄을 반기는 마음에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생명을 계속 유지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예감하는 본능적인 즐거움이 숨어 있다고도 보여 집니다.
모두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전보’를 알겠습니까, ‘적군’이라는 것이나 ‘보릿고개’라는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진 기행’이라고요? 그것을 누가 압니까? 모두 지나간 얘기일 뿐입니다. 봄은 오고, 그런대로 온갖 생명체들은 순환을 계속하고 있지만,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기예보와 함께 미세먼지 걱정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지금은 마스크라도 쓰고 있지만, 미세먼지가 더 심해지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주 남부시장 근처 풍남문 앞을 지나다가, ‘저 것이 어느 때 건물이지?’하다가, 문득 ‘너는 어느 때 사람이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느 때 사람인가.’가 참으로 문제입니다. 말이나 생각부터 지금은 잘 안 쓰는 단어들을 쓰고 표현하다보니, 심하게 말하자면, 동년배, 비슷한 나이또래들과 얘기할 때가 편안하다고 느껴지곤 합니다.
‘나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봄이 온다는 것은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봄이 될 때마다 기억이 되는, 신경 쓰이는, 글귀입니다.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그러면, ‘60이 넘은 사람에게는 봄이 오지 말아야 된다.’라는 얘기냐” 라는 자탄이 떠올라서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나이가 들면, 말하고 쓰는 단어가 낡고 소통이 잘 안 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구조, 논리적 알고리즘, 자체가 구식이기 딱 십상입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거의 필연적입니다. 그것은 땅을 치면서 자기주장을 해봤자, 상대방이 받아들이기에는, 전혀 엉뚱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누구는, “오늘날 시대정신이 무엇이냐, 화두가 무엇이냐, 그것은 ‘소통’이다.” 라고 하는 것을 들을 적이 있습니다. 시대정신을 소통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처럼, ‘언어의 불통’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어디에서 회담을 한다기에 ‘이번에는 뭔가 있으려나?’라고 하며 약간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예상했던 최상의 좋은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르면서 여기저기 언론에서 떠드는 것을 듣고 줏대도 없이 이쪽저쪽으로 휘말렸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막연하게’,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것이 잘못입니다. ‘빅딜’이라는 것이 ‘비가역적인 비핵화’와 ‘전면적인 제제해제’라는 것 아닙니까. 그 뜻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정말로 그것이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이 쪽이 “너, 아프지? 당분간 더 너의 고통을 즐기겠다.”이라면, 저 쪽은 왈, “그렇다. 아프다. 그렇지만 봄날은 간다.”라고 터놓고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봄이 왔고, 이 봄도 곧 갈 것입니다. 북한도 농업 수준이 높아져서인지 보릿고개 얘기가 뜸합니다.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봄날은 간다.’는 말이 더 무섭잖습니까?
우리들이 문제입니다. 오랜 동안 군사독재체제를 거치면서, 그 후유증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국민들 문화 수준이 몰라보게 낮아지고, 내면적인 의식 수준들이 피폐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의식이 깨어있어야 되겠는데, 자극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고,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감각기관이 망가지지 않았는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국가 권력기관들을 감시하고 개편하는 것은 누가 주장해야 합니까. 노무현 정권 때,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권력기관들의 역할을 조정하려 했지만, 안전장치까지는 제도적으로 마련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쳐 오면서 국가 권력 기관이, 댓글부대를 운영하는 등, 온갖 구조적인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 당시 정권의 국회의원들, 관료들, 무슨 짓들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국민들이 그들을 용납하고 있는 것입니까.
봄날은 갑니다. 어제 오늘 내일, 하루하루가 아깝습니다.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농사일도 미룰 수가 없고, 자녀교육은 우리들의 모든 꿈과 희망이 담겨있는 미래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교육이란 다음 세대를 위한 ‘노아의 방주’ 아니겠습니까. 학생들 학력이 너무 낮아졌습니다. 껍데기 졸업장이 많습니다. 졸업인정학력고사 만들어서 상급학교 진학 막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들을 위해서도 상급학교에 들어가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유치원이 사유재산이라고 합니다. 등기부등본을 들먹입니다. 예, 맞습니다. 음식점이 식품위생법을 지켜야 하듯, 유치원도 교육기관이고, 교육법을 지켜야 한다 는 인식은 왜 못 합니까. 재산을 더 증식하려 빚을 내서 유치원을 세우셨습니까. 교육에 대한 사명감도 없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입니까. 이 봄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더 아름답게 사시도록 노력 해보십시오.
을하
을하선생님!
봄날 응달에는 아직 氷雪이 남아있기 마련 아닐까요.
어느 순간 몰래 왔다고 온전히 봄이랄 수 있겠는지요.
남북화해협력 문제도 그렇고,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사이의 커다란 간극도 그렇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부 교육관련 종사자(유치원 원장)들의 비뚤어지고 탐욕 가득한 놀부심보도 그렇고요.
이런 모든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실롤리 실롤리(slowly slowly)”라고 답했다는 어떤 겐라(일정 수준 학업을 마친 티벳 승려)의 답처럼 그렇게 ‘찬찬히 그러나 꾸준히(slow and steady)’ 챙겨가야 겠지요.
어쨌든 ‘봄날은 간다’라는 이 말 속에 여러 가르침이 중의적으로 담겨있는 듯 싶습니다.
을하선생님 지적대로 봄날은 참으로 짧고 그래서 아깝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는군요.
글 잘 읽고 갑니다. 화산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