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입맛’이라고 했던가, 점점 입맛이 까다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곁에서 관심을 갖고 돌봐 줄 사람은 줄어드는데, ‘음식 타박이라니, 눈치를 먹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말이 그렇지, 옛날 대가족이 모여 살았을 때, 밥상머리에서 노인네가, 없는 살림에, ‘입맛 타령’을 하면, 며느리에게 얼마나 눈치를 먹었겠습니까. 나이든 집사람이, 국이 없는 맨밥을 차려주더라도, 눈치를 먹을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시원한 물부터 한 컵 마시고, 식탁에 앉습니다. 집사람은 가끔, ‘요즘 세상에 아침부터 밥을 먹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걸요!’라고 합니다. 칭찬인지, 푸념인지, 역시 눈치는 먹되, 며느리에게서 먹지 않아서 다행이다, 매번 그런 생각을 합니다. 딱히 무엇이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나의 입맛이 지금 그렇다.’ 라고, 얘기할 처지도 아닌 것이 나이가 든 사람들의 입맛 같습니다.
저의 집 김치가 맛 있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님께서 김장을 해주셨을 때까지, 그 때까지가, 그랬었습니다. 건강 때문에 어머님께서 저의 집 김장을 그만 두신 뒤로는, 저의 집 김치는 그 정체성을 잃고 ‘다국적이고 다문화적인 것’이 돼 버렸습니다. 그 것도 그럴 것이, 김장철이 끝날 때쯤이면, 저의 집 식탁에는 여러 경로를 거쳐서온 김치들이 즐비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님께서는 일 년 내내, 장 담그는 것과 함께, 김장 걱정을 하셨습니다. 메주는 동네 어른께 부탁을 드려서 띄어 왔습니다. 고추며 젓갈은, 꼭 언제 사와야 된다고 하시면서 챙기셨습니다. 한 번은 동네에서 가장 맛있다는, 노랑 배추를 구입했는데, 어머님께서 ‘체가 작다.’고 타박을 하셔서, 그 배추를 팔았던 동네 사람을 서운하게 하신적도 있었습니다. ‘음식 맛은 장맛이고, 된장과 고추장맛을 보면 그 집 살림을 알 수가 있다.’는 옛말이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음식 맛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음식의 맛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상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거의 모든 음식이 맛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다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함께 건강상태를 어느 정도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반찬을 골고루 맛보기도 하고, 누구는 몇 가지 반찬만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한 결 같이 음식을 맛있게 즐깁니다. 음식 맛 자체를 절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까요. 음식의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지식은 물론 갖췄다고 하더라도, 그 것도 하나의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누가 바로 그 사람 면전에서 음식타박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맛있다.’라고 하지요.
우리들의 감각기관은 오묘합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피부로 감촉을 느낀다고 합니다. 소위, 다섯 가지 감각, 오감이라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음식 맛을 본다는 것도 오감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뇌가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음식을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입속에서 음식의 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겠지요. 우리들의 감각기관이 묘하다는 것은 결국 오감이라는 것도 뇌에서 가공되어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안경을 꼈을 때가 기억이 됩니다. 안경테가 어찌나 갑갑하게 느껴지던지, 모든 것들이 액자를 통해서, 안경테라는 틀을 통해서, 보였습니다. 얼마를 지내다 보니 지금은 거의 안경테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에서 어느 정도 가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맛도 우리들의 뇌에서 편집하여 느낀다는 얘기입니다.
마을에 들어오다 보면 밭에 배추가 속이 차오르는 것이 눈에 띕니다. 무는 아가씨 장 단지처럼 하얗게 밑 둥이 드러났습니다. 집사람 얘기는 ‘금년 김장은 없다.’라고 하지만, 저는 배추 열 댓 포기와 무 대 여섯 개쯤은 담그려고 합니다. 집사람에게 확인해 보니, 고춧가루는 넉넉하게 남아 있다고 하고, 몇 년 묵은 황새기 젓갈과 실 갈치젓갈이 있으니, ‘김장을 못 할 것도 없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벌써 칠 팔 년 전에, 학생들 신입생 환영회 따라 갔다가, 부안 곰소에서 사 온 천일염이 서너 부대나 남아 있다 보니까, 든든하기까지 합니다. 문제는 된장과 간장, 그리고 고추장입니다. 동네에서 콩을 사다가 쑤어서 메주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메주는 띄우는 냄새가 지독합니다. 내년 봄, 시장에 가서 잘 띄운 메주 몇 덩이 사면, 소금은 있겠다, 집사람이 간장과 된장은 담글 것입니다. 고추장은 진즉부터 아예 사먹고 있습니다.
딸아이가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벌써 두 돌이 가까워지는데, 외손자 녀석과 노는 재미로 눈치 없이 가끔 딸네 집에 갑니다. 반찬은 집사람이 집에서 가져가니까 어디가나 똑 같습니다. 김치는 몇 번 집에서 담가서 가져다 준 것을 딸이 방치해 둔 것을 보고 집사람이 다시는 가져가지 않습니다. 딸집에 가면, 대부분 사 온 반찬들이지만, 딸이 만든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 제가 놀리느라고 ‘엄마 흉내를 냈구나!’하면, 사위가 ‘음식을 썩 잘 하는 편이예요.’라고 딸 편을 듭니다. 그런 사위가 기특하기도 하지만, 안쓰럽게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집사람이 듣고 있든 말든, 곁에 딸이 있든 없든, 사위에게 신신 당부를 합니다. “평생 맛있는 음식 먹으려면 지금부터 잘 길 드려야 하네. 어디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면, 집에 와서 꼭 그렇게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게. 무조건 ‘맛있다.’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돼!”
을하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맛있다’고 하면 안된다는 역설이 재미있습니다.
구수한 삶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순간입니다. 가을 햇살처럼 따사롭고 정겨운 우리네 정취는 어느새 먼 옛 얘기가 돼버린 듯 싶습니다. <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