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 아침에 돌아가셨대요!”

지난 7월 21일, 집사람이 문자메세지를 보고 급하게 외쳤습니다.

“말띠면 어머님이 지금 몇 살이시지?” 제가 물었습니다.

“집나이로는 86세고, 7월말이 생신이시니까, 만으로는 84세예요”

“그게 무슨 말여? 그냥 만으로 85세라고 하면 되겠지. 안 그래?”

어머님께서는 오전에 돌아가셔서 이미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생전의 어머님 모습(2003년 10월)

제 아들이 수요일(7월 22일)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고, 딸은 8월 9일,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집사람과 함께 주말에 할머님께 인사를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부모님 약혼기념 사진(1949년 10월)

부모님께서는 1949년 결혼하셨습니다. 아버님(장인기, 1929 – 미상 )은 전주공업학교 5학년 졸업반이셨고, 어머님(박영례, 1930 – 2015)은, 김제 용지국민학교를 나오셨는데, 20세이셨습니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그 해 아버님께서는 집을 나가셨고, 그 뒤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결혼하신지 11개월되었고, 어머님은 임신 3개월중이셨답니다.

“요즘 사람같으면 알았겠지만, 나는 애기 밴지도 몰랐었다. 애기를 뱄다고 말했으면 느네 아버지가 궁금해서 어떻게든 연락했을지도 모르지.”

“혼처가 두서너군데 났었다. 왜 이쪽으로 끌렸는지 모르겠다. 왠지 이쪽으로 끌리더라.”

어릴때 들었던 어머님의 말씀에는 진한 슬픔이 배어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친구들과 외가를 방문한 기념 사진(1949년)

저는 1973년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군산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리농림학교를 나오신 큰외숙께서 당시 중등교육과 인사계장인 친구에게 쪽지를 써 주셨는데, 그 분이 배려해주신 것 같습니다. 군산여고에는 전주공고를 나온 한기창 교감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아버님이 전주공업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고 아는 분이 있으시냐고 여쭈였습니다. “있다”고 하시며, “여기 이분 이분이 도청에 근무하니 찾아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안 찾아 갔습니다. 고등학교에 선생으로 있으면서도 그런 용기도 없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아버님 모습(전주공업학교 토목과 5년 재학)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할 때 어머님과 큰외숙모님이 오셨습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계룡산에 갔습니다. 갑사도 구경하고 남매탑이 있는 고개마루까지 갔습니다. 교통도 불편한데 어떻게 거기까지 갔었는지 놀라웠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머님은 그때 불과 43세셨습니다.

어머님과 큰외숙모님(1973년 2월, 계룡산 남매탑에서)

어머님과 함께 외갓집 갔던 생각이 납니다. 저의 고향집(익산군 춘포면 용연리 판문)에서 외갓집(김제군 용지면 봉의리 역골)까지는 멀었습니다. 집에서 만경강 뚝을 따라 가다가 대장촌에서 다리를 건넙니다. 난산 뒷쪽을 거쳐 학동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가야합니다. 학동 앞 개천에 버드나무 고목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멀리서 그 나무들이 보이면 외갓집 가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학동 마을을 지나다 보면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대나무를 꺽어달라고 때를 썼습니다.

외갓집에는 어머님이 외삼촌들께 쓴 편지가 여러 뭉치 있었습니다. 어린 나는 편지 내용보다 우표에만 눈이 팔렸습니다. 편지에 무슨 사연이 담겼을까, 지금 짐작해보면 눈물겹습니다.

외갓집에서는 누에를 쳤습니다. 외할머님께서 길쌈도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전기도 없이 등잔불을 켰습니다. 어느날 저녁 식구들이 모여, 나와 몇 살 위인 외사촌 형에게 탁자위의 등잔불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사촌형은 멀리에서 등잔불을 그렸고, 나는 바로 등잔불 옆에서 그렸습니다. 그린 그림이 서로 다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사촌형의 그림은 등잔불 모습이 또렸했으나, 내가 그린 그림은 등잔을 위에서 바라본 ‘등잔불 조감도’였습니다. 식구들이 외사촌형을 추겨세웠을 때, 5살(?)짜리 내 자존심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추석 무렵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님께서 제일 먼저 텃밭으로 ‘돔보콩’를 따러 가셨습니다. 나이들고 맛을 아는 사람들은 돔보콩을 싫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꽃도 오동나무꽃 색깔처럼 자줏색으로 이쁩니다. 지금도 돔보콩을 보면 외할머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님과 며느리, 생후 2개월된 손자(1984년 6월)

고향에 가끔 갔습니다. 큰할머님(할머님의 언니)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큰아주머님이 계셨는데, 방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님이 시집올 때 가져오신 장농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시집 오실 때, 외갓집에 있던 오래 된 깨중나무(참가죽나무)를 베어 만든 장농입니다. 시집 오실 때 가져온 이불은 짙은 초록색 명주로 홑청을 했습니다. 몇 살 때였던가, 아주 어렸을 때, 이불 위에 드러누우면 장딴지에 닿는 차갑고 부드러운 명주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학 두 마리 그려져 있는 장농 문짝에 발을 동동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큰아주머님도 얼마전 돌아가셨고, 아들이 조문을 왔었습니다.

가족사진

저는 33세에 결혼해서 아들 딸 한 명 씩이 있습니다. 첫 아들 낳았을 때 어머님께서 손자를 예뻐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요양원에 5년 가까이 계실 때도 아들이 가끔 찾아뵙도록 시켰습니다. 손자를 보시면, 먼 옛날 당신의 남편 얼굴이 떠오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닮았고, 제 아들이 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입관식을 할 때, 어머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늙어버린 모습이 생소했습니다. 언뜻 고개를 드니, 염하시는 분이 어머님의 고개를 옆으로 숙이셨습니다. 그 순간 어머님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습니다. “얼마나 못다한 말씀이 많으시면 저렇게 피를 토하실까.”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당신의 유언대로 화장을 했습니다. 유골은 저의 집 가족묘원(임실군 신덕면 조월리)에 모셨습니다. 아버님과, 가묘이시지만, 나란하게 묘석을 놓아 드리려고 합니다. 조그만 원두막 같은 묘막도 지으려고 합니다.

어머님의 한 평생은 생각할수록 아들의 가슴에 한으로 맺힙니다.

을하

This Post Has One Comment

  1. editor

    그런 한 평생이셔서

    제가 보기에는 늘 ‘서성이시던’ 권사님이셨습니다.

    따듯하시고

    다정하시고

    부드럽고

    친절이 넘치시던 좋은 어머니셨습니다.

    곱기도 하셨지요.

    귀한 어머니 한 분을 보내 드린 슬픔이 저희에게도 있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신 한 평생이셨으니

    천국에서 영원 안식 누리고 계십니다.

    믿음 안에서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불어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破卵齒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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