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지? 요새는 왜 통 얼굴이 안 보여. 별 일 없지?”
“예. 요즈음에는 저희 텃밭에도 푸성귀가 많이 있거든요.”
“브로콜리는 없지? 지금 내가 밭에 있는데, 몇 개 가져가.”
새벽부터 동네 교회의 장로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시간을 보니 5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제가 전주천변에서 날마다 열리는 새벽시장에 자주 다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전화를 주신 것입니다. 시골 사람들은 부지런합니다. 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낮에는 매우 덥기 때문입니다. 5시경부터 밖에 일을 보다가, 8시 30분쯤, 아침식사를 하면, 꼬박 한나절 일을 다 하는 셈이 됩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출근을 해서 막 업무를 시작하는 시각이, 시골 사람들에게는 한나절 일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는 시간이 됩니다.
시골에서도 땡볕에 일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아침나절이나 더위가 한풀 꺾인 늦은 오후에 일을 봅니다. 동네 어른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굳이 한낮 땡볕에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늦잠을 자다 뒤 늦게 밖으로 나온 게으름뱅이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어느 마을이나 모정은 전망이 좋고 시원한 곳에 있습니다. 어느 도시든 오래된 초등학교들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옛날에도 교육은 중요했다는 것이고, 어느 마을의 모정이 좋은 곳에 있다는 것은 그 마을의 어르신들이 그 만큼 공경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풍수지리에 밝은 최창조 교수도 그런 취지로 얘기 한 적이 있습니다. 집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도, 모정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지나오다가 보면 마음이 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을회관에 에어컨이 있어서 한낮에는 어르신들이 그곳에 모여 계십니다.
세월은 참 빠릅니다. 마흔 살이 갓 넘어서부터는, 십년이 지난 일인지 이십년이 지난 일인지, 세월이 도대체 구분이 안 됩니다. 뭉뚱그려서, 이십년이든 삼십년이든, 통째로 지나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택시를 타면 기사님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어느 때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까?” 나이 드신 분 같으면, “그야 아들 낳았을 때지요.”하기도 하고, “딸이 x x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들었을 때지요.”하기도 합니다. 당나라시대 이태백의 한탄이 절로 나옵니다. “짧은 인생, 그 동안 기뻤던 일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제법 여러 번, 수도 없이 많이 있기는 있었겠지만, 기억나는 것은 불과 몇 가지 밖에 없습니다. 공자께서도 짧게 뭐라고 하셨지요. 눈에 띄는 것은 “50에 지천명”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50이 되었을 때, 내게 주어진 내 삶의 몫이 얼마인지, 그 소명 의식이 들기 시작했다.”쯤 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변하는데, 갑자기 고약하게 사나워지는 사람이 있고, 갈수록 얌전하고 온순해지는 사람이 있어.” 문득 친구가 하는 얘기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들한테 눈치나 얻어먹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야!” 나도 마음에 찔리는 바가 많고, 왠지 뜨끔해서, “어디 가서든지 나부터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하 생각해 보면, 사납게 돌변하는 사람은 아마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릴 때, 젊었을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녀석은 무엇을 했는데, 나를 그렇게 우습게 봐?”하는 생각들이 들면 정말 화가 부쩍 날만도 합니다. 우리들은 각자 삶의 몫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밀가루 한 봉지로 풀을 쑬 수도 있을 것이고,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정체성”이란 묘한 개념입니다. 굳이 수학적인으로 표현하면 “단위원”과 비슷한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학에서 단위원이란 덧셈은 0이고, 곱셈은 1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에, 수학에서 말하는, 0이나 1같은 것들은 무엇일까요. 마음속에 보태도 곱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는 ‘모성애’ 같은 것이겠지요. 미술에서는 “보색(補色)”이 있습니다. 색을 합쳤을 때 무채색이 되는 색을 서로 보색이라 합니다. 흰색부터 검정까지를 무채색이라 합니다. 무채색은 색들의 원형질이고 정체성입니다. 수에서 두 원소가 결합하여 단위원이 되는 것들을 보색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은 소명의식을 느낀 뒤에 10년이 지나서야 “귀에 거슬리게 들리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싫은 소리도 많았지만, 확고한 정체성으로 애틋하게 받아들이셨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승에서 우리의 삶이 짧고 너무 속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한 번 펴 보지 못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 어디까지 닿았느냐가 삶의 한 척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작고한 어느 정치인이 쓴 자신의 묘비명이 화제가 됐었습니다. 쿠데타의 주동자가, 누구의 글귀를 도둑질하여, “사무사(思無邪)니 소이부답(笑而不答)”하면서, 죽을 때까지 뻔뻔스러웠던 것은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훈장을 준 사람도 그렇지만, “대통령 조문”은 어떤 간신배들의 넋두리였습니까. 우리들의 삶은 지나고 보면 비록 짧게 느껴지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는 결코 만만한 시간들이 아닙니다.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점점 누리가 밝아오는 장엄함은 보는 순간은 우주의 정체성이 느껴지는 듯 하는 숭엄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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