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自敍傳)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12간지로 토끼띠인데, 검은색이랍니다. 동지가 지났으니 우선 밤이 짧아지고 그만큼 낮이 길어져서 좋습니다.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진다는 것을 옛사람들은 ‘토장호단(兎長虎短)’이라고 했답니다. 해 뜨는 시각이 묘시(卯時)에서 인시(寅時) 쪽으로 빨라지는 현상을 ‘토끼는 길고 호랑이는 짧다.’라며 ‘문자 놀이’를 한 것입니다. 방마다 새 달력을 걸고, 누가 준 깨끗한 일기장에 전화번호 등등, 각종 메모들을 옮겨서 적었습니다. 새해에는 듬성듬성하게 몇 자씩이라도 일기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무언가 기록을 해뒀더라면 지금처럼 지난 세월이 이렇게 허망하게 느껴지지를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어떻게 지냈었는지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시대에 따라 어떠했는가도 역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일기가 하루하루의 기록이라면 자서전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얘기를 하노라면, 여간 솔직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부끄러운 얘기는 숨기고 싶고 잘했던 일들만 늘어놓고 싶기 마련입니다. 시대 상황까지를 아울러 쓴 자서전을 회고록이라고 부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회고록 가운데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1874-1965)처럼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있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의 회고록처럼, 드러난 사실조차도 왜곡하는 등등,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경우도 흔합니다. 평전(評傳)도 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신뢰도가 다르지만, 일단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서전보다는 비교적 더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5대 자서전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 괴테, 루소, 크로포트킨, 안데르센의 것들을 꼽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처럼 꽤 오래전에 서거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전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자료들과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라고 합니다.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 1930-2020)이 쓴 베토벤 평전은 1977년 초판이 나온 이래 1998년 개정판을 내는 등, 정평이 있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인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는 중국의 고전들 대부분을 영어로 번역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분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캐나다의 마릴린 바우만(Marilyn Laura Bowman 1940- )이라는 분이 ‘제임스 레게와 중국의 고전들(James Legge and the Chinese Classics)’이라는 제목으로 평전을 2016년에 출간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출판했는지,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그분을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이 글을 써서 추모문집을 내기도 합니다. 방한암(方漢岩 1876-1951) 스님은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의 제자랍니다. 2006년은 한암 스님 탄신 130주년을 맞아 ‘그리운 스승 한암 스님’이라는 문집이 나왔습니다. 언젠가 고은 시인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그래, 무슨 얘기가 있던가?’라며 궁금해하셨습니다. 제가 ‘거기에 고려대학교에 계시는 김충렬 교수께서 쓰신 추모글도 있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 그래? 나 김충렬 교수 잘 알아!’ 하셨습니다. ‘원주가 고향인 김충렬 교수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입산하려고 월정사 상원암으로 한암 스님을 찾아갔더니, 한 달 넘게 스님이 계신 방에서 재워주시면서도 머리는 안 깎아 주더랍니다.’ 했더니, 고은 시인께서 ‘아, 그래.’하셨습니다. 소설가 김동리(1913-1995) 선생의 추모집으로는 ‘영원으로 가는 나귀(2005년)’가 있습니다.

누가 언감생심 자서전을 쓰려고 한다면 최소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끄러운 얘기들은 쏙 빼고, 자랑하고 싶은 얘기들만 늘어놓는다면 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가 만무합니다. 한창기(韓彰琪 1936-1997) 선생이 창간했던 잡지 ‘뿌리 깊은 나무(1976-1980)’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이 됐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자신감이 생긴 군사정권은 회유책으로 복간을 제안했다는데, 그때부터 나온 잡지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만든 ‘샘이깊은 물(1984.11-2001.11)’이었습니다. ‘샘이깊은 물’ 표지사진은 언제나 여자 얼굴이었고, 내용 가운데 나이 드신 여자분의 구술이 일정하게 몇 페이지씩 있었습니다. 각계각층 민중들의 회고담이요, 짧막한 자서전이었던 셈인데, 그것이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특집! 한창기’라는 추모집이 2008년에 나왔었는데, 참으로 아까운 분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유행하던 카셋트테잎이 없어진지도 꽤 오래되었고 이제는 씨디플레이어도 새로 나온 웬만한 승용차에 장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1900년대 초반에 설립 된 학교들이 요즈음 몇 년 사이에 개교 100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학교의 역사와 지역사회의 옛 모습을 함께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제 고향 익산군 춘포면의 춘포초등학교도 내년이 개교 100주년이라며 몇 가지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답니다. 그 가운데 ‘춘포초교100년사’를 편찬하는데, 제 친구 아버님 되시는, 이춘기(1906-1991)옹의 일기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기 일부분은 발췌되어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2018년 출간)’라는 단행본으로도 나왔었습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의 솔직하신 회고담을 받아 적어 책으로 묶으면 자서전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사진과 함께 조그만 책자라도 만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을하

#시사전북 2023년 1월호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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