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을 껐답니다. 거의 열흘만입니다. 아직 잔불이 남아서 당분간 주의를 늦출 수는 없답니다. 아까운 산림자원은 물론이고, 수많은 재산 피해가 났고, 75명 가까운 사상자도 발생했습니다. 산불이 계속되는 동안 텔레비전 켜기가 무서웠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엘에이에서 발생한 산불이 주택가를 덮쳐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피해가 났었는데, 막상 그런 재해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다니, 마치 악몽을 꾸는 듯했습니다. 이번 산불의 피해면적은 약 480제곱킬로미터쯤 된답니다. 여의도 면적의 57배쯤 된다는데, 전주시 면적이 205제곱킬로미터쯤이라니까, 산불의 피해면적이 전주시 면적의 2.3배쯤 됐던 셈입니다. 지난해 연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동으로 얼마나 놀랐습니까.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로 상황이 종결되는 것 싶었는데, 뜻밖에 지지부진한 대통령탄핵 인용-기각 논란 속에, 이번 산불은 “엎친 데 덮친 꼴” 이였습니다.
우리 고장 모악산은 만만한 산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미는 그만두고라도,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그냥 산으로서, “정상까지 올라가기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산이다.”라는 뜻입니다. 도립미술관에서 대원사까지는 다닐만할 것 같은데,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 수왕사에서 정상까지는, 제 입장으로 쉽게 맘을 못 내는 형편입니다. 어느 때 독배 마을에서 유곽 마을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매봉쪽으로 가는 능선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몇 번 다녀보니 완만하고 참으로 좋았습니다. 도중에 바위투성이 암릉 지대가 있는데 좀 무섭기는 해도 확 트인 풍경이 절경을 이뤘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 암릉 지대를 지나다가 산불이 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오른편 유곽 마을 쪽 산비탈은 새까맣게 탔고, 왼쪽 중인리 쪽은 멀쩡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 산불이 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었고, 그 뒤에 그 길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감은 본능적입니다. 오래전 우리나라에서는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추송웅이 주연을 맡았던 일인극 연극이 있습니다.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1917년에 발표한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라는 소설이랍니다. 내용은 아프리카 밀림에서 잡혀서 영국으로 싣고 오던 침팬지가 노력 끝에 인간 지능을 갖게 되었고, 그런 과정을 아카데미에 보고하는 것이랍니다. 우리 고장 출신이신 최정호(1933- ) 교수가 베를린에 유학하던 시절 주간한국에 ‘예(藝)’라는 공연 관람기를 연재했습니다. 그 연재 가운데 연극,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을 소개했습니다. 최 교수님은 그 연극의 내용보다 주연배우를 극찬했습니다. 추송웅은 “99% 침팬지인데 1%가 사람”이었다면, 그 주연배우의 연기는, “99% 사람인데 언뜻 보이는 1%가 침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1%가 그렇게 공포감이 들더라는 얘기였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현생하고 있는 우리 인류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지구 온난화 문제 못지않게, 걱정입니다. 텔레비전 교육방송채널에 ‘위대한 수업’이라는 세계적인 석학의 강연 시리즈가 있습니다. 지난주는 ‘마이클 루스(M. Ruse 1940-2024)’ 교수의 ‘진화론과 종교’라는 주제의 강의였습니다. 그분은 ‘사회적-문화적 환경도 인간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 팽배한 극단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여러 현상을 볼 때 ‘우리 민족 심성이 어느 쪽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심히 염려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과학이 그만큼 발달하지 못한 까닭도 있겠지만, 매사에 조심조심했습니다. 자연현상으로 봤을 일도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한 탓이 아닌가 하며 되돌아봤습니다. 산불도 옛날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몹쓸 업보가 나타난 증상으로 보고 우리보다 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빅터 차(Victor Cha 1961- )는 미국에서 정치학을 다루는 몇 안 되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우리가 미국인 가운데 한국계라면, 그들 조상의 모국인 한국에 대하여, 퍽 한국에 우호적일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인입니다. 얼마 전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던 성 김(Sung Kim 1960- )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이나 중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한국에 대하여 애정을 얼마만큼 갖고 있더라도, 예를 들어서, 축구 경기를 한다면, 어느 편을 응원하겠습니까.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계엄에 빅터 차가 ‘아마 혼란이 오래갈 것 같다’라는 취지로 말했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빅터 차가 ‘한국의 현 상황을 수습하려면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다시 뽑는 수밖에 없다.’고 했답니다. 무슨 남다른 고급 정보가 있는지, 참으로 혜안이고 석학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지난해 분명히 내란이 있었습니다. 늦은 밤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하여 개머리판으로 유리창을 부수고 진입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텔레비전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여-야 모두 내란이 있었다니까, 당시 내란이 없었다는 사람은 아마 윤석열 대통령 한 사람뿐일 것입니다. 지금은 여-야 모두 내란이 있었다고 하면서 서로가 상대방이 ‘내란 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십 보 백 보’, 함께 도망가면서 서로를 흉보는 것도 아니고, 쫓기던 쪽이 아예 돌아서서 쫓아오던 쪽과 맞붙어서 싸우는 꼴입니다. 헌법을 끝까지 어기면서, 마은혁을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지 않은 채, 현재의 헌법재판관 8명이, 찬성5 대 기각 3으로, 대통령탄핵이 기각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번 산불보다 더 무서운 어떤 사태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몇몇 주동자들에게서 엿보이는 1%의 야수 같은 모습이 참으로 두렵고 무섭습니다.
을하
#시사전북 2025년 4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