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 전> 매월당, 그 ‘불우’가 섧습니다

‘매월당 김시습 시선집’은 북한에서 출간한 총 20권의 <조선고전문학선집> 중 제 7권으로 중국 연변 작가 협회 이원길 부주석의 추천으로 출판하였다. 그 책을 우리나라에서 ‘도서출판 해누리’가 1994년에 옮겨 만들었다. 책머리에 ‘김시습의 생애와 그의 창작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여기에서는, 매월당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하여, 앞부분만을 짦게 줄여 소개 한다. 

 

김시습은 1436년(세종 17년) 서울 성균관 부근의 빈한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워졌습니다. 그는 혼자 여덟달만에 글을 익혀 친척인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시습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루는 당시의 재상 허주가 찾아와서 “나는 늙은이다”라고 하자 이에 대꾸하여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젊었으리”라는 구절을 지었다.

그의 재질은 마침내 궁궁에까지 소문나게 되어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다섯살이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김시습을 만나보고 그 재간을 기특하게 여겨 상으로 비단 50필을 주었다. 김시습은 그 비단필을 끝마다 연결하여 한 끝을 쥐고 궁문밖을 나갔다고 한다.

김시습은 13살 때부터 대사성 김반에게서 논어, 맹자, 시전 춘추를 배웠고 사성 윤상에게서 주역, 예기, 역사 문헌 등을 배웠다. 김시습이 15상 되던 해에 어머니 장씨가 돌아가시자 그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도 어머니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그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에는 몸져 누운 아버지밖에 없었다. 이렇듯 그의 소년시기는 험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잠시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그는 후세에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러지게 되고, 전국을 유랑하다가 성종대에 이르러 한양에 들어갔다.

44세에는 머리를 기르고 안씨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었으나 그의 가정생활은 순탄하지만은 못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처자가 다 죽었다.

1493년 3월경 그가 마지막으로 부여 홍산 무량사에서 병들어 몸져눕게 되자 자필로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고 그 옆에다가

너의 용모는 지극히 못생겼고

너의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니

너는 심산궁곡속에 파묻혀 있음이 적당하도다

라고 썼는데 그것은 당시 현실을 심산궁곡으로 본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기행문집인 관서록에 있는 ‘산가(山家)’라는 시를 한 편 보자.

 

           산골집

 

산골 시내가 널판집

부들바자에 외넌출 얽었네.

 

처마밑엔 비들기 노래하고

울밑엔 어린이 소꿉질

 

벼, 기장이랑은 넘실넘실

소, 염소 지는 해 푸염하네

 

이곳에 오래오래 사는자는

생전에 현손도 본다더라.

 

      山家(산가)

 

板屋依山磵    (판옥의산간)

檉籬瓜瓞繁    (정리과질번)

錦鳩鳴屋角    (금구명옥각)

稚子語籬根    (치자어리근)

禾黍田原逈    (화서전원형)

牛羊落日喧    (우양락일훤)

人言居此地    (인언거차지)

往往見玄孫    (왕왕견현손)

 

북한에서 번역한 문장이 무척 시적이다. 우리들에게 생소한 용어들이 많다.

정리(檉籬) : 부들로 만든 울타리

과질(瓜瓞) :  크고 작은 오이들

화서(禾黍) :  벼와 기장

훤(喧) : 떠들다 

현손(玄孫) : 증손자

 

24세 무렵의 젊었을 때의 시인데, 그렇게 편안한 안착을 알면서도 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던 매월당의 불우와 고독이 시간을 초월하여 섧게 느껴집니다.

 

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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