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39> 바나나 문제와 에셔의 생각

‘바나나 문제’란 새로운 용어가 관심을 끈다. 어떤 아이가 “‘바나나’라는 말은 할 줄 아는데 어디서 끝나는 지는 몰라”라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a가 거듭 반복돼 쓰이는 철자법 때문에 헷갈린 탓이다.

바나나 문제는 이 어린이의 말처럼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면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바나나 문제는 끝나는 지점이 명확하지 않은 애매한 상황이다. 상상력이 넘치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는 모두 이에 해당된다. 바로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반복순환 상황을 꼬집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음악부호의 Fine표시가 안된 도돌이표와는 또 차원이 다르다. 끝지점 표시를 안한 악보란 작곡자가 깜빡 실수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경우다. 아니면 연주자를 일부러 골탕 먹이기 위한 심술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무엇보다 답답한 것 중의 하나가 지겹도록 겪었던 따분함을 또다시 거듭거듭 되풀이해 겪어야 하는 일이다. 어쨌건 이즈음 딱 우리가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 작금의 우리 과잉사회에서 바나나문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분야 모두 쉽사리 매듭져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그저 간단히 웃어넘길 수 없는 노릇이다.

잘 한다 잘 한다 하면 도에 넘치게 오버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진정으로 잘 해서 잘한다고 한 게 아니건만. 잘 하라고 격려 고무하는 뜻에서 짐짓 추켜 준 것도 모르는 거다. 정치가 그렇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가 그렇고 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처방식이 그렇다. 분명히 시작이 있고 행위가 있다면 선과 후가 있어야 하고 적절한 대응과 마무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불거진 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재판이 진행중인 사안이라는 말만 녹음기처럼 거듭될 따름이다.

급기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이 일어섰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개입 책임을 물어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오죽하면 성직자들이 나서겠는가. 정치가 그만큼 실망의 극을 달리고 있다. 게다가 아예 무대응을 최후의 선택수단이라고 믿는 듯한 대통령의 태도가 사제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한 성당 주임신부의 말 속에 그 사연과 까닭이 있다.

“그동안은 대통령 사퇴 요구를 주저했는데, 시발점이 국가기관을 동원한 불법·부정선거였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수위를 높여 대통령 사퇴를 촉구할 것”이라는 말이다. 성직자의 겸애와 신중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일반 국민들은 어떠했겠는가. 또한 그 사제의 말이 곧 역사의 반복과 상황의 악순환을 지적한다.

“유신시대인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됐는데, 당시 첫번째 시국선언문을 읽어보니, 공안정치 하지 마라, 관제언론 만들지 마라, 경제민주화 실현하라, 학생·지식인 잡아가지 마라 등 현 상황과 똑같았다.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행동할 것이다.” 참으로 불행스럽게도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정상회담 대화록 유출문제도 그렇다. 마치 대화록을 본 듯 마구 떠벌이던 이들이 지금은 뭐라고 하고 있는가. 대화록 요약본을 본 게 아니고 찌라시를 보고 정리한 것이란다. 믿을 만 한 근거도 박약하고 그냥 시중에 그런 뜬소문이 돈다는 내용이 담긴 종이쪼가리를 그처럼 신봉했다는 말인가. 참으로 기가 찬다. 무엇보다 선거 때는 내용을 잔뜩 부풀려 무슨 큰 사달이라도 난 양 난리법석을 떨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이제는 볼 짱 다 봤다는 것인지 유야무야 얼버무리고 있다. 참으로 가관이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그런 치졸한 속내는 철부지들이나 머리 덜 여문 건깡깡이들이 써먹는 비린내 나는 수법 아니던가.

먼 옛날 크레타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가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이다.” 여기서 어떤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에피메니데스가 말한 것이 참이라면, 그가 말한 대로 사실은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그 또한 그가 말한 진술과 일치된다. 다시 말해 지켜보는 우리는 그야말로 이상야릇하고도 아리송한 다람쥐 쳇바퀴 속에 빠져든 꼴이 된다. 어지간히 얼을 차리지 않고선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나선무늬를 보는 듯한 어지러움에 휩쓸린다.

살다보면 이같이 얄궂고 고약한 경험을 거부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누가 나더러 행복을 만들어달라고 했는가. 그런 적도 없건만 공연히 자기들이 나서서 설쳐댄다. 정치인들이다. 마치 한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듯 선심들이다. 잠자코 놔두는 편이 외려 더 편하겠건만 괜스레 찧고 까불어서 심사를 어지럽힌다. 기초노령연금이 그랬고 역사교과서가 그랬다. 게다가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는데도 늘린다던 일자리는 그대로다. 하기는 복지는 국민전체 힘으로 이뤄내는 것이지 대통령이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찬찬한 생각을 가진 작가(조정래)의 말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과 정부가 주는 어지럼증에서 벗어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한번 살펴보자. 대통령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잔다크도 아니다. 경제난국을 헤쳐나간 마거릿 대처 영국수상도 아니다. 하니 핑핑 도는 머리가 아니라 고요히 가라앉은 머리로 차분하게 생각할 일이다. 이제 상대방의 현혹수법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 중심잡기가 필요하다. 이런 때엔 한 예술가의 성찰을 빌려옴직하다. 바로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 C. Escher)라는 판화가다. 익히 알다시피 그의 작품들은 가르침과 울림이 크다. 현실의 영원한 나선구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네 김씨 이씨들에게 잠시 숨을 멈추고 자신을 살피라고 타이른다. 그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가르친다.

서로의 손을 그리는 손, 바벨탑…. 어디선가 한 번씩 봄직한 에셔의 그림들이다. 주로 착시에서 빚어지는 모순된 현실을 그린 작품들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평면이나 공간을 표현한다. 흔히 고정관념을 벗어나라, 관점을 전환하라, 생각의 폭을 넓혀라, 상대성을 인식하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실천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이런 열 마디의 말보다 에셔의 그림 한 장을 보면 메시지가 뚜렷해진다.

‘도마뱀’ 을 보자. 도마뱀이 스케치북을 빠져나와 살아있는 생물로 활동하다 또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과 물’에서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는 어느 순간 하늘을 나는 새로 변환돼 있다. 어떤 작품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하얀 날개에 두손을 모은 천사들 속에 검은 악마들이 짝으로 존재한다. ‘폭포’라는 작품에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처음에 물이 떨어지는 곳에 도달해 있다. 에셔가 이런 작품을 만든 것은 아마도 현실의 모순을 ‘반복과 순환’이라는 틀로 풀어보려 한 것 아닌가 짐작된다. 몰론 출발점에서 앞으로 계속 달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출발점에 도달하게 되는 이상한 고리가 있기는 있다. 바로 뫼비우스의 띠다. 굳이 에셔의 작품을 짚어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야릇하고 몽롱한 듯 하지만 현실 속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 나름대로 담겨있는 듯해서다.

에셔는 수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의 작품들 속에 수학적 원리와 상상력들이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는 유명한 수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러면서 예술적 표현의 토대를 다졌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고 알려진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에셔를 대중 스타로 만든 것도 수학자들이다. 저명한 수학자들이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된 수학적인 원리를 소개하면서부터 더더욱 명성을 날리게 됐다.

이런 에셔에게 아버지는 조언했다. 에셔의 공식, W = M/2 + 10이다. W는 여자의 나이, M은 남자의 나이다. 집을 떠나게 된 젊은 에셔에게 앞으로 여자를 만나게 될 때 참고하라고 충고로 써준 것이라고 한다. 가벼운 우스개였으리라. 사실 에셔의 작품을 보면 어느 쪽이 양이고 음인지, 삼차원 공간에서 현실적으로 존재가 가능한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종잡을 수 없다. 때문에 끊임없이 맴돌아 어지럽기까지 하다. 아마 끝없는 반복과 순환, 윤회와 맴돌이를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한다. 인간을 더듬이가 잘린 곤충들의 처지에 빗댄 것이 아닌가도 싶다. 평면의 두 끝을 이었는데도 안과 밖을 구분 지을 수 없는 경우도 분명히 현실에 존재한다. 수학자들이 흔히 제시하는 뫼비우스의 띠의 경우다. 어쩌면 에셔는 선이란 것도, 악이란 것도 한 몸이자 한 뿌리임을 표현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런 것을 칼로 두부모 자르듯이 나는 선, 너는 악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세상살이에 얼마나 될 것인가.

전쟁터에서 한 장수가 이렇게 말했다. 영웅이 되고 싶은가! / 용서치 않겠다. / 도망치는 자는 / 살아남을 수 있다. / 제군들 모두가 / 멍청이다. / 적들은 / 반드시 승리한다. / 하찮은 무기를 보라. / 우리의 것이다./ 승리는 /생각마라. / 포기할 때가 왔다./ 가자!

아군의 처참한 전황이 보이고 모두들 곧장 내빼게 생겼다. 하지만 이럴 때 한가지 방법이 있다. 홀딱 뒤집어 생각하는 거다. 내 정신건강에 유리하게 하는 요령이다. 진정 내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가자! / 때가 왔다./ 포기할 / 생각마라. / 승리는 / 우리의 것이다./ 하찮은 무기를 보라./ 반드시 승리한다./ 적들은 / 멍청이다. / 제군들 모두가 / 살아남을 수 있다. /도망치는 자는 / 용서치 않겠다. / 영웅이 되고 싶은가!

장수가 이런 말을 했는데도 그래도 내빼고 싶겠는가. 널리 떠돌아다니는 글이지만 뒤집어 생각하기가 얼마나 급전직하로 상황을 뒤바꿔 주는 지 잘 보여준다. 답답한 현실에서 뒤집어 생각하기도 우리에게 현명한 사고방식의 하나일 듯싶다.

우리 현실의 바나나 문제는 어지럽고도 즐비하다. 그러나 에셔의 사고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할 듯하다. 대통령이 저리도 귀를 막고 줄기차게 한 쪽만 바라보고 있으니…                     <화산>

This Post Has One Comment

  1. 박천배

    에셔는 우리 머리를 혼란시키죠. 유쾌한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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