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베란다에 꽃이 피었다. 엄동은 아닐지라도 한겨울인데 말이다. 바로 매화다. 밖은 온통 눈인데 꽃이라니. 역시 매화는 매화다. 화품이 들에 핀 야매(野梅)와 같기야 하겠는가마는. 그래도 반갑기 그지없다. 해마다 제 본분을 다하는 영특한 녀석이다.
새해 벽두지만 세상은 어수선하고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 갈곳 몰라 방황하고 있다. 하여 어지럽고 심란하기 짝이 없다. 에멜무지로 상서로운 생각, 희망에 찬 기대를 가져보려 하나 부질없기 짝이 없다. 이런 때 매화로나마 위안을 삼으려 한다. 매화가 그저 고결하고 냉염(冷艶)하기만 한 꽃은 아니기에 말이다. 망국의 비탄과 도탄에 처한 민초들의 삶을 이겨내는 투쟁과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도 했기에 그렇다. 바로 매월당(김시습)과 매천(황현)의 아호에 들어있는 ‘매’자의 의미가 그것 아니던가.
“나의 삶에 희망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런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삶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한다. 난 그냥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게 두려워서 산다.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난 무엇을 기대하면서 세상을 살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고난을 헤치고 힘든 일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는 피할 수 없다. 취업도 해야 되고, 결혼도 해야 되고, 세상이 나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은 온통 하기 부담스러운 것들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걸 감내하면서까지 생을 이어간다. 내 삶의 희망은 어쩌면 생명 유지인 것 같다.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 혹은 현재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같은 건 나에게 없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내가 못난 사람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이만 고만하면 남들과 같이 평범한 캐릭터 아닌가. 난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들을 보고 대단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그러한 것들을 감당하면서 지켜낼 자신은 아직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의 희망은 그저 언제나처럼 지금같은 ‘행복’을 유지하면서 그냥저냥 사는 것이다.”
서울의 모여대 4학년생의 글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취업을 준비중인) 요즘 젊은이의 머릿속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 글은 요컨대 ‘지금만큼이라도 살고 싶다’는 방어적인 희망사항을 드러내준다. 취업을 원하기는 하되 간절하다기보다 그저 지금의 생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누가 이 젊은이의 생각을 이렇게 만든 걸까. 물론 당사자의 의지와 삶의 태도가 가장 먼저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책임도 분명 있다.
왜 바쁘게 사는데 가슴은 텅 비어 있는가. 사회가 그런가, 내가 잘못인가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삶은 기대처럼 잘 굴러가지 않았다. 너도나도 지금만큼이라도 살고 싶다고 토로한다.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말하지 못하는 고통 앞에 단지 옆에 나처럼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위로받기에는 삶은 너무 치열하다. 아 이게 내 삶인가. 다른 사람들의 삶도 이럴까. 이렇게 내 삶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답은 없다.
왜 희망할수록 절망하게 되는가. 희망을 갈구하면 할수록 삶에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빠지기 쉬운가. “그래서 어쩌자고?” 따지듯 되묻는다.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는 삶,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력서는 무조건 100개는 써야한다고 말하는 취업준비생들. 그들도 희망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희망할수록 절망한다는 것을.
희망이 있다고 우리는 섣부르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희망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희망이 있기는 한 건가. 하지만 대책은커녕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도 믿지 않는 희망을 주장하고 희망을 믿는 척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황감 또는 상실감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사회가 격노하고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 하고 싶어서 하는 일,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 깨어있고 싶어서 자지 않는 시간, 이런 것들이 참으로 그리워진다. 다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크로노스의 시간! 희망이 없으니 죽고, 희망이 없으니 인생을 포기하고, 희망이 으니 없으니 대충 살겠다고 한다. 도대체 희망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희망이라는 녀석이 뭐길래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곱씹어보는 것이 이반 일리히의 기대와 희망의 차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일리히는 기대보다 희망에 가치를 두는 사람을 ‘상품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 이런 사람을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이라고 했다.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을 꿈꾸는 그는 결국 희망에 가치를 더 준다.
응원은 희망이 된다. 언젠가는 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은 희망이 아니다. 그저 믿음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이 의미가 있고 이 삶을 꾸려가기 위한 내 수고를 누군가 응원해줄 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내 삶에 이렇게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행운이다. 무턱대고 응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파하고 이해해줘야 한다.
현대사회는 무한경쟁으로 인해 피로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회다. 다시말해 피로사회, 절망사회라고 불린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
이른바 2030세대는 너무 일찍 비정한 경쟁사회의 ‘쓴맛’을 알아버렸다. 40세대는 제대로 용 한번 써보기도 전에 ‘피로와 노쇠’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5060세대는 떠밀리듯 인생 메이저리그에서 밀려나거나 결별하는 고민에 불쑥불쑥 ‘황망함’에 빠지곤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모든 나쁜 것이 상자에서 빠져나온 것과 같은 상황이다. 역설적으로 현실이 암울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망에 기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희망이란 결국 꿈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산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무언가를 목표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희망을 버린다면 그는 무엇을 하든 성공하기 어렵다. 희망을 버렸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숨쉬는 한 희망은 있다(Spero, spera)”라는 격언을 되뇌는 것은 자상한 응원일 수 있다.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따뜻한 격려라고 본다. 간절히 갈구하면 희망도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연한 무엇에 대한 갈망은 사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호들갑스럽게 희망을 소리 높여 외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게 뻔하다. 오히려 그런 행위는 큰 실망과 낙담, 그리고 절망만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행복을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는 것처럼.
그러한 이치를 알기에 우리는 피로사회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으로 무책임한 희망 부추기기 대신 차분한 기대담론을 나눠야 한다. 어쨌든 결론은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은 있다고 우겨서는 아무 것도 안된다. 바로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치료법이라면 그 효험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막무가내로 덥석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참 흉흉해졌다. 오늘날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 가운데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이 적지 않다. “도대체 요즘엔 왜 이렇게 사이코가 많을까?” 신문과 TV뉴스에는 하루가 머다 하고 잔혹한 사건이 보도된다. 아들 시신을 냉동보관한 비정한 아버지, 묻지마 살인, 동서양을 막론한 총기난사까지, 점점 더 많아지고 잔인해지는 심리장애 징후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맞물려 새로운 형태의 흉악 범죄가 늘어난다고들 한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 대표적이다. 유영철의 흉악한 범죄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긴 후, 유사한 형태의 사이코패스형 살인 사건이 이어졌다. 끔찍한 살인사건을 넘어 인격 모독적인 사건들도 넘쳐난다.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주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몇몇 사이코패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는 건 평범한 일이다. 분노가 넘치는 이 시대를 ‘분노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운전을 할 때 수시로 본다. 자그마한 일에도 분노해서 보복 운전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늘어날까.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증오가 사방에서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세월호 사태로 우리는 국가가 국민을 버리고도 태연자약하게 오히려 유가족을 엄벌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드라마 ‘송곳’은 우리가 애써 눈감아온 한국의 비정한 실상, 즉 사람을 짐짝처럼 쓰고 버리려 하는 세태를 여과없이 보여줬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 아이들의 삶의 길은 이미 정해진 것 같지 않은가? 10대 때는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하며 시험 답안 찍는 기계로 길러지고, 대학에 가서는 등록금 때문에 허리 휘어가며 ‘직장 입시‘ 준비하느라 바쁘다. 그래 봤자 입사 6개월 된 신입 직원을 ‘명퇴‘ 시키는 대기업, 노동자임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공무원직이 모두의 인생 목표가 돼버렸다. 이런 사회에서는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바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엽기 살인마를 낳는 세상이 되었다는 한탄이 나오는 원인일 게다.
사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를 벗어나 살 수 없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끝없는 경쟁이 이루어진다. 경쟁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끝없이 이어진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루저’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다. 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불안하고, 우울하고, 때로는 감정이 분노로 솟을 것이다. 자신을 버린 사회와 사람들에 대해. 오늘날 능력지향적 교육은 100명의 학생 가운데 1명의 1등을 제외한 99명을 패자로 만든다. 기업은 여전히 성과만을 강조하며, 개인들은 극한의 경쟁에 숨이 막힌다. 기업 밖도 상황이 악화되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은 지식공장이, 병원은 건강기업이 됐다. 결국 좋은 삶과 거리가 먼 현재로 퇴보한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문제는 과거보다 더 늘었을 뿐만 아니라 양상도 전혀 다르다. 모든 실패가 개인의 재능과 노력 부족으로 귀결되는 사회에서 실패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위험한’ 타인에 대한 빗나간 공격성으로 드러난다.
기대는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책정되고 배분된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공식은 예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절대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몇몇 성공신화들을 가지고 우리 사회는 마치 ‘하면 된다’는 공식이 우리사회 규범인양 떠든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진실은 ‘하면 된다’가 아니라 ‘네 출신이나 파악해라’라는 말에 담겨 있다. 이 말이야말로 ‘하면 된다’는 말에 감춰진 뒷면이다. 우리 사회가 짐짓 약속한 ‘하면 된다’라는 말도 거짓말에 불과하다. ‘하면 된다’라는 공식에는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 사람들은 흔히 ‘하면 된다’라는 말 앞에 ‘무엇이든지’라는 말이 생략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면 된다’라는 말은 ‘무엇이든지 된다’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하면 뭐든지 된다고 믿어왔다. 아니,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하면 된다’라는 기대의 공식이야말로 우리가 왜 절망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왜 세상에 냉소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숨어있다. ‘하면 된다’ 의 이면에는‘되지 않는 것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반대되는 말로 보이지만 사실 이 두가지 말이 ‘기대’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무 거나 한다고 해서 다 되지는 않는다. 기대는 ‘철저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만 기대하라’는 명령이다. 이 말에는 기대할 수 없는 것, 우리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이미 정해놓은 것은 쓸데없이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
희망은 불가능을 꿈꾸는 것이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 선을 그은 권력을 해체하는 것, 선 너머에 서 인간의 삶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 이것이 희망이다. 적어도 머릿속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각자에게 분배된 틀 안에서 노력하고 그 결과 일어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라고 명령한다. 기대의 시회에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일은 불온하다. 우리 사회의 분배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건 기대뿐이다.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기대의 공식마저 무너지고 있다. 희망은 고사하고 개인에게 배분되기로 약속된 기대마저도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회가 우리에게 약속한 것은 기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냉소한다. 사람들에게 우리사회에 어떤 기대를 하느냐고 물으면 냉소적인 답변만 돌아온다. 기대하는 바가 없다는 얘기다. 기대하면 할수록 배신만 당했다고 분노한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한 친구는 더 극단적으로 강변한다. 이 친구는 우리 사회에 바라는 게 딱 하나가 있다고 했다. 자기 앞길을 가로막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이렇게 되었다.
기대인지 희망인지는 각자가 선택할 길이다. 냉소와 증오보다는 낫다.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다. <화산>

‘추위에도 매화는 향기를 잃지 않고, 오랜 세월에도 거문고는 소리가 변하지 안느다’는 글이 유명합니다. 그 문장에 나오는 ‘한매(寒梅)’는 ‘한 겨울에 피는 매화’라고 여깁니다. 중국의 시인 가운데 육유(陸游)가 유별나게 매화를 좋아했다고, 시선(詩仙)-이백(李白) 불선(佛仙)-왕유(王維)와 함께, 매선(梅仙)이라는 부릅니다. 누가 매화를 좋아하여 집 둘레에 가득 심어 즐겼는데, 어떤 사람이 ‘봄에 피는 것도 매화냐’고 하니 싹 베어버렸답니다. 한 겨울에 피는 매화는 없습니다. 중국 남쪽 지방이나, 실내에서 가꾼 분재들이나 한 겨울 눈내릴 때 핍니다. 날씨가 따뜻하면 우리 고장에서도 겨울에 간혹 피지만 추워지면 이내 얼어서 떨어집니다. 재래종 매화는 약간 일찍은 핍니다. 매화가 봄에 피었다고 싹 베어버린 사람은 바보입니다. 겨울에 꽃을 보려면 매화를 화분에 심어서 안방, 아니면 베란다에 놓아야 합니다. 화산 선생님 처럼!
<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