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저절로 돌아가는가. 그런 것 같지만 결코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선(善)의지와 착한 동력도 작용하지만 엄연히 악(惡)의지와 나쁜 동력도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세상이 저절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아니면 둘이 뒤섞인 방향이든 어떤 의지나 책략에 의해 꾸며져 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번 돌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 그리 허술하고 만만한 곳이던가. 아무런 의지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어떤 안간힘이나 발버둥도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으랴. 설사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횡재나 예기치 않던 행운마저도 모두 까닭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인과의 법칙이라 해도 좋다. 또는 섭리이건 인연이건 마찬가지다. 단지 표현마다 다를 뿐이다.
싱거운 소리 하나 해보자. 로또가 당첨되려면 복권을 사야만 한다. 당첨이 벼락을 연거푸 거듭 맞아야 할 희박하고도 희한한 확률일지라도 그게 제로보다는 수백 수천 배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복권을 안 사는데 어찌 당첨을 기대한단 말인가. 하기는 복권을 사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도 벅차고 힘겹다.
미친 등록금, 치솟는 집값과 전세값, 뛰다 못해 나는 물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목받지 못하는 투쟁 등. 오늘날 한국에서 삶을 이어가는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부담 없이 사먹던 채소나 과일 등 생필품값마저 급등해서 서민들 어깨를 움츠리게 하고 장기불황에 서민들은 죽지 못해 아우성이다. 생활고를 못이긴 가장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가 하면 노동자들은 분신으로 고단한 인생을 항변한다. 동네 슈퍼는 슈퍼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라는 덩치 큰 대식가에 밀려 굶어죽을 판이다. 청년실업과 함께 높은 실업률에 따른 일자리부족 때문에 집집마다 허덕인다. 그만큼 세상인심이 강퍅해지고 활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신산스런 현실에서 무엇이 사람들 마음을 다잡게 할 것인가. 어느 종교지도자나 철학가마저도 그 직분을 다 하기는 쉽지 않다. 이처럼 흉흉한 세상현실을 모든 국민들이 몸소 겪고 있다. 이런 팍팍한 현실에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에릭 홉스봄의 명언을 떠올리며 기운을 차리자고 호소해볼 따름이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Interesting Times)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저 이런 단순명료한 지적 앞에서 모두들 한번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잡을 뿐이다.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피땀으로 이뤄냈듯이, 좋은 세상은 결코 그냥 오지 않는다. 살기 좋은 세상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치열한 고민과 꾸준한 실천으로 피땀 흘려 노력해야만이 살기 좋은 세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잘못된 것과 맞서고, 힘 있는 세력과 싸우고, 무관심을 털어내야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대다수 시민들이 경제수준이나 민주화의 척도에서 이 정도면 만족할 수준이라고 여길 만큼 사회분위기가 변한 부분도 있다. 그것이 어느 분야에서의 완성이나 완결로 이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피땀 흘려 노력하기는 힘에 부친다는 측면도 있지만 말이다.
이 암울한 경제현실 속에서 세상은 저절로 좋아질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때문에 실업인은 경제현장에서, 학자와 학생은 학교에서, 근로자는 일터에서 잘못을 고치기 위해 땀흘리고 고민해야 한다. 불황과 경기침체는 극복돼야 하고 어떻게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이란 비유컨대 이렇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친 코끼리 한 마리로부터 공격을 받고 정신없이 도망치게 되었다. 아무 데도 피할 곳이 없어 눈앞에 보이는 낭떠러지로 숨게 됐다. 마침 낭떠러지 절벽으로는 등나무 넝쿨이 뻗어 내려져 있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붙들고 절벽으로 내려갔다. 절벽 밑을 바라보던 나그네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밑바닥에는 시퍼렇게 독이 오른 뱀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뿐이 아니었다. 또 낭떠러지 중턱의 사방을 둘러보니 새끼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아 낭떠러지 중간에 매달려 있자니, 두 팔은 아파오고 힘이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며 자기의 생명줄인 등나무 넝쿨을 쏠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낭떠러지 위에서는 들불이 일어나 절벽까지 넘실넘실 불꽃이 밀려오는 가운데 나그네는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란 얼마나 짧은가? 바로 그때 입속에 무엇인가 똑똑 떨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받아먹어 보니 달디 단 꿀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꿀맛에 취해 잠시 코끼리와 들불, 쥐, 독사 따위의 공포를 잊었다. 그 순간 벌들이 날아와 나그네를 사정없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비유, 낭떠러지에 갇힌 나그네 이야기다. 여기서 황야는 중생이 살아가는 거칠고 험한 세상(三界)을 상징하고 나그네는 중생을, 코끼리는 번뇌를 비유한 것이며 등나무 넝쿨은 생명을, 독사는 죽음을, 독사 새끼들은 질병을 의미한다. 등나무 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흰 쥐는 낮, 검은 쥐는 밤을 의미하니 쥐는 곧 시간이다. 이처럼 절박한 것이 중생의 삶인데도 중생은 번뇌와 생로병사를 벗어날 이치는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위험을 잊은 채 몇 방울의 꿀맛을 탐닉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여기서 꿀은 인간의 오욕락(五慾樂) 즉 재물, 이성, 음식, 명예, 편안함에의 욕망을 상징하고, 벌은 그 쾌락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를 상징한다. 이렇게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인생을 비유한 설화가 바로 이 낭떠러지의 나그네 이야기이다.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신세.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 몇 방울을 먹던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겠는가? 우리네 중생들은 쾌락에 넋이 팔려 죽음과 번뇌가 닥쳐오는 줄을 모른다. 삶은 짧은 것, 쾌락은 덧없는 것이라는 뻔한 이치를 망각한 채 욕망에 허덕인다. 힘써 지혜를 계발하고, 선정을 닦고 행위를 맑혀 삼계의 고통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은 마치 지옥과도 같다. 우리는 끊임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나 죽음이란 우리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네 삶이 고통스럽다 하여 쉽게 자기 목숨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이렇게 말했다. 고통의 바다, 곧 고해(苦海). 그렇다.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다. 그래서 사람들은 꽉 막힌 경제를 풀어줄 영웅이나 리더를 갈망한다. 누군가 지옥 같은 이 세상을 천국과도 같은 곳으로 바꿔줄 존재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는 언제나 난망하다.
먹고사는 문제가 이처럼 절박해진 적이 없다. 한마디로 위기다. 경제난국 해결에 올인해야 할 정부가 너무나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심이 떠나가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경제는 지금이 최대고비이다. 뿐만아니라 IMF는 우리나라의 금년도 경제 성장률을 2.9%에서 0.2%P를 하향조정한 2.7%로 낮춰 발표했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우리나라 경제가 좋지 않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국내외적으로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좋아질 전망이 없다고 진단되고 있다면 범국가적으로 경제 활성화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도무지 위기의식이 없다. 그저 무사안일에 빠져 수수방관한다. 이럴 때 리더의 중요성이 새삼스럽다, 메시아는 아닐지라도 혜안 있는 지도자가 그래서 중요하다. 위기에서 국가와 국민을 구하는 지도자는 오로지 국민이 선택한다. 그 때문에 국민들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위기에 처한 경제현실을 풀어낼 결단이 없는 지도자도 지도자인가. 무능한 지도자를 선택한 국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