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이 즈음이면 회한과 후회가 밀려들게 마련이다. 잘 살았어도 가는 한해가 못내 아쉽고 잘못 살았으면 더욱 자책하는 것이 범부들의 속성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선택의 오류도 있지만 물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실천의 여부다. 하지만 선택을 망설이게 만드는 딜레마 앞에서 우리는 번민한다. 특히 장기 불황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선택의 폭이 좁아진 요즘에는 한번의 선택으로 치르는 기회비용의 가치가 더욱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햄릿’은 결정적인 순간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번민했다.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인공 햄릿의 우유부단한 캐릭터를 한 마디로 압축해준다. 이른바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이라 불리는 신조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요즘 많은 소비자들이 ‘결정 장애’ 또는 ‘선택 장애’를 겪으며 내적 갈등을 일컬을 때 쓰인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이토록 많은 정보가 제공되는 스마트폰 시대에 오히려 결정과 선택에 혼란이 생기다니. 여기에는 다 까닭이 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오히려 선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광고를 가장한 정보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이같은 갈등은 자기결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 아닌가. 때문에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언제고 갈팡질팡할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선과 악에 대한 딜레마를 겪는다. 그것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가 괴테의 ‘파우스트‘다. 학자인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타협한다. 오로지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악마는 파우스트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 대가로 영혼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 버린 파우스트는 자신이 얻은 지식을 유용하게 활용한다. 파우스트는 행복할까.
만약 당신에게 악마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악마가 찾아와 당신에게 영생(永生)을 약속한다.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그 대가는 가혹하다. 악마는 영생을 얻는 길은 흡혈귀가 되는 길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마도 당신은 파우스트처럼 딜레마에 빠질 것이 뻔하다. 흡혈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바쳐 영생을 얻는 아이러니를 갖는다. 또 흡혈귀는 생명력을 소유한 존재인 동시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뺏어야만 한다. 비록 타인의 생명에 기생하여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는 영원히 살 수 있다. 또 낮에 방황하는 것 말고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그리 로맨틱한 것은 아니다. 흡혈귀들은 영생을 꿈꾸지만 희망은 없다. 언젠가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삶은 파괴되고 모든 것이 죽음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는 한다. 그러나 여기에 모순이 발생한다. 산 자가 없으면 흡혈귀의 세계도 종말을 고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흡혈귀가 영생을 얻는다는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흡혈귀가 되고자 욕망하는 자는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만일 당신이 불치의 암으로 인해 내일 죽을 몸이라면, 혹은 자살하기 위해 다리 난간에 서 있을 때 악마의 손길이 다가왔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당신은 악마의 제의를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이쯤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선한 존재인가, 아닌가?
어떤 부패한 경찰서장은 붙잡힌 남편을 이용해 그의 아름다운 아내 토스카를 차지하려고 한다. 토스카에게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하면 남편을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토스카는 제안을 수락한다. 경찰서장은 토스카가 들어올 때 토스카가 들을 수 있도록 거짓 총살집행을 지시한다. 이 명령을 들은 토스카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경찰서장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남편에게 다가간 토스카는 총에 공포탄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경찰서장의 지시는 거짓이어서 실탄이 장전되어 총살당한다. 토스카는 추격을 당하다가 성 위에서 몸을 던진다. 이것이 토스카의 비극이다.
과일은 감미로운 향기와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다. 씨를 퍼뜨려줄 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풋과일 상태에서 동물의 먹이가 되면 씨가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풋과일에는 동물들이 먹지 못하도록 독성물질이 있다. 우리가 풋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이유다. 과일에마저 트랩이 있다.
요즘 정세 돌아가는 꼴은 ‘칠실지우(漆室之憂)’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노(魯)나라의 한 천한 여자가 캄캄한 방에서 나랏일을 걱정했다는 그 이야기다. ‘열녀전’ ‘인지(仁智)’ 편에 보면 춘추시대 노나라 목공(穆公)때 칠실 마을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기둥을 안고 울었다. 누가 ‘아직 결혼을 못해서 그러는가?’ 묻자 ‘어찌 그렇겠습니까? 나라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라 걱정은 조정 대신이나 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칠실 땅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 우리 집에 이웃 나라의 난을 피해 도망 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이 손님은 말을 우리 집 아욱 밭에 매어 두었는데, 말고삐가 풀어지는 바람에 우리 아욱 밭이 못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한 해 동안 아욱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임금이 늙었는데 태자가 어립니다. 상황이 이런데 이웃 나라에서 그냥 두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임금이나 벼슬아치들, 남정네만 고생하겠습니까?’ 과연 3년 뒤 제나라와 초나라가 쳐들어와서 노나라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여인들도 막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본디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을 근심함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를 다시 생각케 한다. 정부와 정치인이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고 정치인을 염려하는 지경이 돼버렸다. 거꾸로 돼도 한참 거꾸로 된 세상이다.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칠렐레팔렐레’라는 그들만의 언어가 판을 친다. 언뜻 들으면 꽤나 성조있는 단어로 들린다. 의미상으로는 본디 칠령팔락(七零八落)이란 단어에서 온 듯한데 그다지 고상하게 전해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헬렐레한 얼굴표정으로 넋줄 놓고 판치는 칠푼이 쯤을 가리키는 말이지 싶다. 그 젊은이들 용어를 차용한다면 요즘 나라의 지도자라는 이와 정치인들은 십중팔구 칠렐레팔렐레 홍야홍야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아마도 어떤 위대한 지도자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칠색 팔색을 하면서 당장 그런 건방진 언사를 한 이를 국가모독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한 나그네가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고 길조차 없는 벌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뒤에서 집채만 한 성난 코끼리 한 마리가 단숨에 그를 밟아 죽일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나그네는 기를 쓰고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니 낭떠러지에 이르렀다. 그 아래로 칡넝쿨 한 줄기가 드리워져 있어 얼른 넝쿨에 매달려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숨겼다. 사나운 기세로 뒤쫓아오던 코끼리는 낭떠러지 아래로는 내려갈 수가 없어 위에서 어슬렁거렸다. 일단 코끼리는 피했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 본 나그네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낭떠러지 밑바닥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한 복판에는 무서운 독룡이 독기를 내뿜으며 먹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사각사각 나는 소리에 위를 보니 어디선가 나타난 흰쥐와 검은 쥐가 서로 번갈아 나그네가 움켜쥔 그 칡넝쿨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 아닌가. 어서 이 끔찍한 낭떠러지를 빠져나가려 했던 나그네가 보니 어슬렁거리던 코끼리는 어디 가고 없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어디선가 자욱한 연기가 매캐하게 밀려들었다. 그것은 벌겋게 타오르는 사방을 휩쓸고 가는 엄청난 들불이었다. 진퇴양난, 이제 나그네는 더 이상 어떻게 움직여 볼 희망조차 없었다. 오직 언제 떨어질지 모를 아슬아슬한 한 줄기 넝쿨만 부여잡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디서인지 꿀물 다섯 방울이 나그네의 입술에 똑똑 떨어졌다. 그 때 어디선가 벌 다섯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너무도 달콤한 그 맛에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닥친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꿀벌들이 날아다니며 나그네의 얼굴과 머리를 쏜다. 그 와중에 벌을 피하려 몸을 움직이다가 하마터면 넝쿨을 잡고 있던 손을 놓칠 뻔도 했다. 나그네의 괴로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자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는 불경에 나오는 우리네 인생에 대한 비유다. 사람이 태어나 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이 나그네와 어찌 다르겠는가. 여기서 나그네는 인생 그 자체를 나타낸다. 황량한 저 벌판은 빛이 없이 길고 캄캄한 밤중 같은 무명장야(無明長夜)를,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낭떠러지 아래는 태어나고 죽는 일로 험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가리킨다. 칡넝쿨은 결코 영원하지 못한 우리의 가녀린 생명줄을 비유했다. 검은 쥐와 흰쥐는 밤과 낮의 세월을 의미한다. 독사 네 마리는 우리의 육신을 이루고 있는 4가지 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나타낸다. 다섯 방울의 꿀물은 오욕락(五慾樂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꿀벌은 삿된 생각을, 들불은 병듦을, 독룡은 영원한 우리의 숙제인 죽음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들의 한평생 삶의 참모습은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닌지. 마치 낭떠러지의 무시무시한 고통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우선은 달콤한 꿀물에 정신이 빠져 전혀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즐겁지만 삿되고 그릇된 바탕인 오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그네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지금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알아차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해가 오는 시기에는 더욱 스스로를 살필 일이다.
한 장님이 등불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누가 물었다. “눈이 멀었는데 등불을 들고 다니다니. 바보천치로군. 등불은 뭣 땜에 들고 있소.” 그러자 그 장님이 대답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요. 눈뜬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 함이오.” 과연 누가 배워야 하는가.
화담 서경덕이 어느 날 길에서 울고 있는 젊은이를 만났다. “어째서 우느냐?”고 물었다.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스무 해가 지났습니다. 아침에 나와서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눈이 띄어 천지만물이 보이니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만 집에 돌아가려 하나 갈림길도 많고 비슷비슷한 집들이 많아 찾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화담이 타일렀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리하면 네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리니.” 화담의 주문이 정녕 청년에게 다시 장님으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아니라는 것은 뻔하다.
그리스 신화중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기구절창했다. 아버지인줄 모르고 아버지를 죽였다. 어머니인줄 모르고 아내로 삼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맹목(盲目)을 원망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 미련함을 인정하고 두 눈을 뽑아 스스로 장님이 돼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눈을 뽑은 뒤에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더 잘 보았을까.
프랑스 인상파 화가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화가가 눈을 감겠다니 무슨 뜻인가. 모순된 말 같지만 거기엔 철학이 숨어 있다.
대학 정심(正心)장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
순진함(childish)과 유치함(childlike)은 한 끗 차이다. 어린애다운 것은 순진할 수 있어도 어린이는 어린이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박카스의 청춘’에서 ‘우루사의 직장인’을 거쳐 ‘케토톱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다시 눈 밝고 꿋꿋한 존재가 돼야 한다. ‘용왕정진’ ‘용맹정진’이란 면벽참선하는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경구가 아니다. 우리네 김씨이씨들 모두에게 필요한 말이다. 새해 벽두 머리맡에 써 붙여야할 화두일지 모른다.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면 당연히 그것(흙)은 없어지나 그릇의 쓰임이 생겨난다.” 도덕경의 가르침이다.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지 않을 일이다. 외려 육신이 마음을 담는 그릇이 돼야 한다. 마음과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에 갈무리와 비롯됨이 있어야 할 때가 이 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