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72> 아버지의 눈물

이 땅의 어떤 사람도 남성이라면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그리하여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이런 사연을 고스란히 그려낸 시 한 편을 보자.

바쁜 사람들도/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이다. 마디마디 자식의 마음을 울린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곡진한 부분은 이 대목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그렇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 눈물을 비치겠는가. 아버지들은 세상 궂은일에 속마음은 아리고 맵싸해도 자식들 앞에서는 천연스럽다 못해 아닌 보살을 한다. 뿐인가. 피붙이에 대한 아버지의 헌신과 배려는 드러나지 않아도 그윽하고 깊다. 아버지로서 감내해야 하는 삶의 무게와 고뇌란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식솔들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는 매일 매일의 힘든 수고와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다. 살면서 외로움으로 야위면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어린것들의 순수한 피, 곧 자식들의 올바른 성장과 순진무구밖에 없다. 겉으로만 볼 때 아버지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끄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은 근심과 걱정으로 앓으며 마음의 눈물을 흘린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은 이 땅의 아저씨들이 아버지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아버지의 나라엔 웃음보다는 시름이 더 많다. 돌아보면 세상은 갈수록 어지럽고, 자식들은 어리기만 하다. 이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에 뜨거운 것이 맺힌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의 눈에 별빛이 담기는 것은 세상의 풍파가 그만큼 거세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기엔 세상바람은 차고 별들은 너무 멀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어느 방송에서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부자 아버지, 잘난 아버지는 못되어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말한 40대 평범한 아버지의 토로가 코끝을 찡하게 한다. 한 가족이 식탁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며 마감하는 것이 가장 평범하면서도 최고의 행복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 힘든 세상이 돼간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아버지가 돼본 사람들은 안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가정을 지키는 수호자이기에 약해서도 안 되고 울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도 몰래 혼자서 운다.

 

어두운 밤 초췌한 모습으로 산을 내려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따뜻한 죽 한 사발도 권하지 않고 당장 돌아가라 호통치셨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다시 산을 오르는 아들의 귓가엔 불 꺼진 방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떡 써는 소리가 쟁쟁거린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얘기다, 바로 한석봉의 일화다. 어머니의 속깊은 사랑은 그런 거다.

그 사람의 어머니 장씨 부인은 매우 현명했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특히 아들을 교육시킬 때만큼은 무척 엄격했다. 처음 아들과 함께 살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철부지 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했다. 상여를 메고 가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상두꾼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땅을 파고 관을 묻는 장난도 하며 놀았다. 이를 본 장씨 부인은 생각했다, ‘이 곳은 자식을 기를 만한 곳이 못 되는구나.’ 그래서 장씨 부인은 곧 집을 옮겼는데 시장 근처였다. 그러자 아들은 또 장사꾼들이 장사하는 흉내를 내며 노는 거였다. ‘여기도 자식을 기를 곳이 못 되는구나.’ 장씨 부인은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이번에는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아들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과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이로구나.’ 장씨 부인은 비로소 마음이 흡족해졌다. 이 사람은 모두 주지하다시피 바로 맹자다.

맹자는 사대부가 익혀야 하는 육예․〔(), (), (), (), (), ()의 하나인 어(:수레 몰기)를 익히다가 그만 팔을 다치고 말았다. 맹자는 몹시 부끄러웠다. 집에 계신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맹자는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집을 떠나올 때 이후로 줄곧 못 뵈었는데 그 때가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졌다. 팔을 다치자 더더욱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기회에 어머니를 뵙고 와야겠다.’ 맹자는 스승 자사에게 허락을 받고 집으로 향했다. 장씨 부인은 마침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던 터였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기븐 마음으로 맹자는 어머니께 인사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가운 시선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래, 공부는 끝냈느냐?” 어머니의 목소리는 엄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했다. “평생 배워도 못다할 공부인데 어떻게 벌써 다 배웠겠습니까?” “그러냐? 그런데 어찌하여 벌써 돌아왔느냐?” “어머니, 저눈 그저 잠깐이나마 어머니를 뵙고 가려는 생각에맹자는 다친 팔이 나을 동안 어머니를 찾아뵙도록 스승에게 허락받았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하더니 갑자기 칼을 집어들어 다짜고짜 짜고 있던 베를 잘라버리는 것 아닌가. 맹자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어머니를 바라봤다. “, 봤느냐? 네가 보기에 이 끊어진 베가 한 필의 온전한 베가 될 수 있겠느냐?” 그 순간 어머니의 말뜻을 알아차린 맹자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들아, 네가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이 베올이 끊어진 것과 같은 거다. 이 정도 돌아다닐 만한 상처라면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맹자는 그 슌간 곧바로 집을 떠나야 했다.

 

한나라 때 한백유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잘못을 저지르면 어머니로부터 종아리를 맞으며 훈계 받았다. 백유의 어머니는 엄하고 강직해서 백유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백유는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백유가 장성해서 철이 들어서도 어머니의 가르침은 계속됐다. 어느 날 백유의 잘못에 어머니는 다시 회초리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운 적 없던 백유가 이날따라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의아하게 여겨 매질을 멈추고 아들에게 물었다. “아니 아들아, 지금까지 그토록 매를 맞았어도 울지 않던 네가 오늘은 무슨 까닭에 우는 거냐?” 백유는 답했다. “어머니! 제가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때는 그 매가 몹시 아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매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는 겁니다.”

어느 새 어머니가 늙어 회초리가 아프지 않을 정도가 됐다니 그것이 슬펐던 거였다.

오월이다. 먹고살기 바빴다는 핑계로 잊고 지냈던 어버이의 존재에 대해 새삼 돌아봐야 할 때다. 매일같이 보살펴드리고 챙겨드려야 할 어른들인데도 이런 저런 구실로 자식노릇을 못해온 터다. 일 년 내내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오월 한 달만큼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어버이를 섬겨볼 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드려 보자.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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