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53>이 문제는 우리 문제가 아닙니까?

바닷가 모래밭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는 세 살 배기 아기. 빨간 티셔츠에 감청색 반바지를 입고 마치 잠자는 듯 숨죽인 채 그대로인 아기. 이 아기는 그러나 왜 죽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나갔다. 숨진 채 발견된 이 아기는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다. 쿠르디는 운동화까지 신고 있어 금방이라도 일어나 친구들과 놀러나갈 차림새였다. 쿠르디의 죽음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쿠르디는 지난 2일 새벽 터키 남부 보드룸 휴양지 인근 해변에서 발견됐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IS)의 위협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시리아에서 탈출하던 중이었다. 터키에서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로 가던 중 배가 뒤집혀 엄마와 다섯 살 형과 함께 바다에 빠져 숨졌다.

영국의 진보 일간지 인디펜던트에는 쿠르디의 주검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실렸다. “우리는 정말 이 이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Do we really believe that this is not our problem?)”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쿠르디를 추모하는 물결이 일고 있다. ‘파도에 휩쓸린 인도주의’(#KiyiyaVuranInsanlik)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추모 메시지를 담은 패러디 사진과 그림도 앞 다퉈 실린다. 영국으로 난민을 수용하는 조처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던 캐머런 영국 총리는 여론이 급변하면서 도덕적 책임들을 이행할 것이라고 하루 만에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내가 만일 난민이었다면? 쿠르디가 만일 내 아들이나 손자였다면? 어떻게 우리가 대처하고 무엇을 했을까. 그 결과에 대한 상상은 모두 각자에 맡긴다.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뿐, 전쟁을 통해 자본을 늘려가고 그 늘어난 자본으로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획책하는 군산복합 자본주의가 이 지구상에 엄존하는 한 우리는 모두 잠재적 난민이다.

쿠르디의 죽음을 올바로 봐야 그 어린 영혼이 처참해지지 않는다. 단지 쿠르디에서 끝나지 않고, 유럽으로 몰려드는 시리아 난민 문제 전반을 살펴봐야 한다. 거기에는 난민 문제를 낳은 유럽의 각종 구조적 모순을 분석하는 일도 포함돼 있다. 올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려다 지중해에서 숨진 난민은 2600명이 넘는다. 2600명이 넘는 쿠르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 많은 쿠르디를 가슴으로 아파했을까.

 

식량문제 또한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뜻을 같이 한다. 세상의 모든 갈등과 격차를 낳는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오래된 난제가 바로 식량문제라고. 사실 사람이 존재한 이래로 먹는 것과의 싸움 아닌 싸움은 영원한 숙제였다. 먹을 것이 풍요로운 자는 남는 힘을 엉뚱한 곳에다 썼다. 사치해서 타락하거나 이웃나라를 침탈했다. 먹을 것이 모자란 자는 늘 하인 노릇을 하거나 노예가 됐다. 오늘날 스스로 일하면 얼마든지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구조적으로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기아는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해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이 풍요로운 세계에서 기아를 종식하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공약만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행동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가 오래전부터 약속해왔듯이 기아를 정말로 세상에서 몰아낼 때입니다.”

맞는 말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아는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어왔던 문제다. 배고픔은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들과 갈등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고, 불평등을 고착하고 빈곤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됐다. 기아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한 인간의 삶을 넘어 자손대대로 전해져 삶을 망가뜨렸다. 기아는 한 인간과 한 부족, 한 나라 국민들의 삶을 인간다움이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피폐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 인간이 한 생명으로서 신체적 활동을 해나가기에 필요한 충분한 식량을 구하지 못해 생겨나는 문제가 바로 기아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 식량 생산량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될 터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식량은 충분하다. 다만 고르게 나눠지지 않을 뿐이다.

실상은 어떠한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10억에 이르는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또 하루 25천명이 영양실조와 기아에서 얻은 질병으로 사망한다. 기아는 무엇보다 유아와 아동에게 치명적이며 그 후유증은 평생 지속된다.’ (우리의 비만 그들의 기아’ ‘서문에서)

그렇다면 왜 기아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식량 생산은 여전히 인구보다 더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 전 지구적인 수확량은 전 지구인의 칼로리 공급에 필요한 것보다 2분의 1이나 더 많다. 물론 통계는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식량이 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에 점점 더 많은 농작물이 바이오 연료, 섬유 내지 다른 산업 제품의 생산, 또는 사료로 이용된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47%만 직접적인 영양원으로 활용된다. 그 밖에도 육류를 얻기 위해 곡물사료를 활용하는 것은 에너지 총계로 보았을 때 커다란 손실이다. 에너지 작물 재배 때문에 식량 작물 경작에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줄어드는 것 역시 국제 공동체가 당면한 새로운 도전이다. () 따라서 세계적으로는 식량이 충분하지만, 모든 식량을 기아 및 빈곤 퇴치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앞의 책 60)

전문가들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수십 년 넘게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그보다 더 뿌리가 깊다. 토지, 생산수단 및 교육과 건강 접근권, 의료 서비스 등 사회적 서비스는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고, 이런 불균형은 불안한 식량 사정을 불러온다. 이는 인간의 기본권인 식량권 확보를 둘러싼 끝없는 투쟁으로 이어진다.

언론이 세계 곳곳의 식량위기와 기아를 보도하지만, 사헬 지역의 가뭄, 아시아의 홍수, 파키스탄에서 세기의 대홍수로 곤란에 처한 사람들이 잠시 언론을 장식할 뿐,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만성 기아에 시달리는 무수한 사람들은 주목조차 받지 못한다. 이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기아와 영양실조와의 투쟁은 윤리적, 인도주의적 의무일 뿐 아니라 국제 공동체의 경제적, 사회적, 안전 정책적 과제이다. 이 과제는 국제적인 동시에 국가적으로 취급해야 한다.(앞의 책 들어가며에서)

우리는 항상 알고 있었다고 해야 옳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풍요로운 세상의 한 편에는 누군가가 여전히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개별 국가들의 자연적, 정치적 특수상황과 뒤틀리고 왜곡된 세계 경제시스템 및 투기자본에 노출된 곡물시장에 의해 더욱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모두의 적극적인 노력이 불충분하다는 점도.

하지만 과연 기아 문제가 저 먼 제3세계의 문제, 우리가 그들에게 원조해줘야 할 문제인가. 우리가, 전 세계가 기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문제가 나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라고만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기아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 곧 식량문제라면, 기실 기아의 반대편에는 비만이 존재한다. 풍요로운 사람들의 비만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구촌이 된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실상 세계는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식량문제는 두 세계 중 어디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개발도상국 인구의 약 75퍼센트에게 식량문제는 먹을거리 부족을 해결하는 문제다. 모두가 풍족히 먹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까’ ‘기아와 영양실조를 극복하려면 장기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다른 지역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식량 자급을 이루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등이 그 본질이다.

반면 선진국의 식량문제는 그와 다르다. ‘비만, 특히 아동 비만을 척결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비만이 초래하는 많은 질병과 의료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사회는 매일매일 세계의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식량을 내버리거나 썩히고 있는데, 이런 일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등이 그 내용이다. 선진국에서는 식량의 최대 50퍼센트가 버려지는데, 그 양은 약 2000만 톤에 달한다.‘ (앞의 책 서문에서)

여전히 수많은 지역과 나라들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하고 그로인해 영양부족(기아, 영양결핍)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에게는 남는 식량이 그들에겐 부족하고 우리에겐 비만이 고민이지만 그들에겐 기아가 걱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기아로부터 눈을 돌리며 그저 우리의 비만만을 걱정하고 있다. 식량 문제, 즉 기아문제를 해결할 진정한 주체는 비만을 걱정하고 있는, 영양불량 상태에 있는 우리들 자신이며, 기아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세상이 더 인간다운 곳이 되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기아와 빈곤 퇴치에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식량은 충분하지만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지지 않는 상황은 여전히 심각한 형편이고, 이젠 곡물이 대체 에너지원으로 부각되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기아와 빈곤 퇴치는 지구상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멋진, 가장 위대한 진보라 할 수 있다. 이 진보를 위해 최초로 국제적인 공조를 약속한 세계 식량정상회담이 1996년 열렸으며 2000년 뉴욕에서 새천년선언과 구체적인 새천년개발목표(MDG)가 제시되어 채택되었다. 2015년까지 굶주리는 인구를 절반, 42000만 명 이하로 줄이자는 이 목표는 오늘날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2007년 이후, 기아 인구는 감소하기는커녕 도리어 증가했고, 102000만 명이라는 최고점을 기록했다. 이는 개발도상국 인구의 약 20%에 해당한다. 2010년 당시 전 세계적인 상황은 약간 호전되었지만 기아 인구는 약 92500만 명(16%)으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이 새천년개발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즉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한 개발 정책이나 원조 정책만으로는 결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전 인류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 과제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들만 나서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식량과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가가 되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다. 이젠 진정으로 당신이 변화하고 행동해야 할 때다. 그런 뜻에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말이 지구상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여기서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할 것인지 생각해 달라

 

우리나라 갑부 모씨의 이야기다. 젊어서 새우젓 등짐장수였던 그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나라 굴지의 갑부가 됐다. 갑부가 된 그에게는 찾아오는 사람이 차츰 많아졌다. 따라서 응접실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는 서양식 응접실로, 또 하나는 우리 전통의 사랑방으로 갖추어 놓았다. 두 방을 다 으리으리하게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접객을 많이 했던 그는 옛날 새우젓 등짐장수 시절의 친구들이 그리워 졌다. 수소문을 해서 그들을 불러 모았다. 옛 친구들이 자신을 만나면 무척 반가워할 줄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친구들이 서로 눈치들만 살피고 쭈뼛쭈뼛하면서 좋은 방으로 안내를 해도 잘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고, 고급 음식을 대접해도 잘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또 기회를 보아 슬금슬금 모두 빠져 나가고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극진한 대접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옛 친구들을 원망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돌려 그들의 처지로 돌아가 생각해봤다. 그랬다. 그들에게는 으리으리한 응접실이나 고급 음식들이 모두가 생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주인도 옛날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거북하기만 했다. 갑부는 과연 그럴 것이라고 공감했다. 그러자 갑부는 또 하나의 응접실을 만들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인 토담집 초가삼간에다가 방안에는 흙벽 그대로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방문 옆에다 새우젓 지게 하나를 걸어 놓았다. 그리고는 막걸리 항아리와 삶은 돼지다리를 푸짐하게 준비해 놓고, 투전도 몇 판 마련해 두었다. 그런 뒤에 자신도 새우젓 장수 시절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 친구들을 다시 맞았다. 그러자 모임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겨워졌다. 이 초가삼간이 그들에게는 으리으리한 사랑보다도 고급 양관보다도 마음 편한 자리였던 거다. 양식이다 무슨 식이다 하는 고급 요리보다도 막걸리가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투전판은 그들에게는 더없는 오락이었던 거였다. 갑부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알았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속담을 떠올린다. 그만큼 사람은 제 생각만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남의 염병이 내 염병으로 얼마든지 전해질 수 있는 세상이다. 메르스의 공포가 그랬다. 때문에 쿠르디의 아픔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기아도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슬픔이자 아픔이다.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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