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25. 허깨비에 홀리지 않으려면

당나라 때였다. 한 고승이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그는 운수행각중이었다. 낙양 혜림사에 이르렀다. 그날따라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땔감마저 없었다. 그 스님은 법당으로 가서 목불을 꺼내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깜짝 놀란 원주(院主) 스님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어찌하여 부처님을 태우는가?” 그는 막대기로 재를 헤치며 답했다. “사리를 얻으려고요.” 원주는 비웃으며 야단쳤다.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고 그런 미친 짓을 했소. 그건 나무토막이요.” 그는 대꾸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꾸짖는가?” 그는 단하(丹霞)였다.

우리는 원주처럼 사는가, 아니면 단하처럼 사는가? 모르면 모르되 거개가 원주처럼 미망 속에 허우적댄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헤맨다. 그렇다고 크게 탓할 바는 아니다. 그 혼돈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죄 없는 우리 이웃들이야 그렇다 치자. 문제는 우리의 대표라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을까 고민 끝에 뽑아놓은 그들이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그들이 더 원주처럼 설쳐댄다. 왜 우리는 대표를 뽑아놓고도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아야 하는가.

대통령이건 국회의원이건 지자체 단체장이건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단하를 꾸짖는 원주같은 존재들이다. 그토록 도덕적으로 완벽함을 부르짖던 대통령이 친인척 측근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온다. 뿐인가. 당대표가 되기 위해 돈봉투를 돌리는 것이 관행이라니 웃음조차 안 나온다. 대선후보 경선마저도 돈이 난무했다는 판국이다. 세상이 다 그러려니 하면 뭐 그다지 깜짝이나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뿔싸! 이제 믿어야 할 곳은 어디라는 말인가. 그 똑똑하고 잘난 우리의 선량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

어떤 화가가 임금을 위해 그림을 그려 줬다. 그러자 임금이 그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 화가가 답했다. 개나 말 같은 게 어렵습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그리기 쉬운가?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게 가장 쉽습니다. 개나 말은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데다 아침저녁으로 늘 보는 것이어서 그와 똑같이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형체가 없어서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아무렇게나 기묘하게만 그리면 남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얘기다.

이처럼 속임수로 귀신이나 잘 그리는 화가는 진정한 화가가 아니다. 개나 말도 핍진하게 잘 그릴 줄 알아야 참다운 화가라는 말이다. 어느 중견화가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냐고. 그 역시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미나리(美拿里: 아름다움을 낚아채는 마을)’라는 화실에 미나리를 그려놓고 자기 우주에 깊이 빠져있는 이다. 왜 미나리냐고? 겨울에 푸르름을 잃지 않는 푸성귀가 바로 미나리 아닌가. 아마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지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凋也)라’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어느 미나리가 누르팅팅하단 말인가. 미나리는 푸르러야 한다. 이 땅에 미나리같은 선량들과 유권자들이 가득하길 고대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뽑은 대표들은 당면한 현실의 숙제 풀이는 접어둔 채 그저 막연한 비전만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귀신 그리기가 쉽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밥을 먹으면 살 수 있으니까 밥을 먹으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이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소 먹일 사료값이 없어서 소를 굶겨 죽인 농민더러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조사하겠다는 것이 요즘 농정당국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도대체 어느 법이 그다지 철두철미했으며 그 법은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또 어느 공무원께서 그처럼 사명감이 투철했는지 알 길 없다. 그런 벽창호같은 존재들이 지금 주민의 대표를 자처한다.

모름지기 선량들은 어떻게 해야 밥을 만들 쌀을 구할 수 있고 무슨 수를 써야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방법을 제시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방법론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일자리를 만들겠다, 농민을 살리겠다는 공허한 다짐뿐이다.

학교는 또 어떤가. 어리디 어린 학생들 사이에 성폭력이 횡행하질 않나, ‘일진’이라는 애들의 우격다짐식 폭력에다 돈 갈취, 왕따는 뭐 다반사니 도대체 어찌 수습해야할지 경황이 없다. 그런 지옥같은 나날을 견디다 못한 가엾은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통한을 품고 목숨을 버린다.

세상에는 숱한 이매망량(魑魅魍魎)들이 득실거린다. 돈 도깨비, 권세 도깨비, 거짓(허위) 도깨비, 폭력 도깨비… 이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헛것들에게 얼을 빼앗기지 않는 이가 드물다. 누구도 이 형체 없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이를 보기가 어렵다. 이들 이매망량에 현혹되기 때문에 우리는 헛된 욕망 속에서 허덕인다. 하여 이 허깨비들에게 홀리지 않고 정신을 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평범한 김씨, 이씨, 박씨다. 하지만 현실이 삭막하다고 그저 비관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어려운 때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똑바로 추슬러야 한다.

현실에서 토끼오리를 놓고 토끼냐, 오리냐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저 토끼오리라면 그뿐이다. 그걸 굳이 따져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한들 견백동이(堅白同異)식 속 뵈는 수작일 따름이다. 옳고 그름이 나뉘지 않는다면 새 이름을 지으면 될 터.

돼지가 개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꿈이 있다 치자. 그 꿈은 개꿈인가, 돼지꿈인가. 복되기를 원한다면 돼지꿈일 것이요, 허망하다고 푸념할라치면 개꿈일 터이다. 그렇듯 세상일을 풀어나가는 요량도 같은 이치대로 할 일이다.

龍雨 龍雨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龍不雨 龍不龍(용이 비를 안 내리면 용이 용인가?)

龍雨 龍龍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龍雨 龍雨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고운(孤雲) 최치원의 글이다. 唐에 유학 가서 과거에 급제한 그 문장이다. 그 때 唐은 심한 가뭄으로 사회가 혼란했다. 고운이 이 글을 쓰자마자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다. 이내 가뭄이 해소되고 풍년이 들었다고 전해온다. 龍, 雨, 不, 단 세 가지 글자를 써서 비를 내리게 했다니 과연 당대 최고의 문장가임이 분명하다.

불현듯 고운의 이 글이 떠오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흑룡의 해를 맞아서 저마다의 운이 크게 상승하리라는 기대들이 넘친다. 심지어 출산률마저 높아지리라고 성급하게 기대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때 당나라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태평하지 못한 게 오늘의 현실이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난국에다 곳곳에서 학교폭력 때문에 나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몸을 버리는 악몽같은 현실이 이어진다. 어찌하면 이 어지러운 국면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모두들 고심참담하고 있다. 그런데도 가슴 아픈 현실은 아랑곳없이 나라는 벌써부터 온통 선거판에 휩쓸려간다. 도대체 선거란 게 뭐길래 이처럼 아수라장인가.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가 역시나 하고 실망하기 한두 번이던가. 그렇다고 선거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제발 이제는 선거라는 허깨비에 결코 넋을 내주지 말자는 얘기다. 선거판이 돈이 넘실대는 푸닥거리 판이 아니라 참다운 잔치판이 되려면 모두가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진정코 단하처럼 얼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거다.

한 가지 덧붙이자. 너도나도 잠룡(潛龍)이나 선량을 자처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부디 최치원 선생 같은 지극한 마음을 품으시라. 그리하여 어둠과 혼돈을 걷어주시라. 그야말로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국민들이 떨쳐 일어나게끔.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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