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10. 국화꽃이 고수<高壽>라

 

국화 향기가 짙어간다. 들판의 구절초와 산국의 빛깔이 소담스럽고 마당의 잘 가꿔진 현애며 대륜이며 분재의 꽃송이들도 날로 향기를 더해간다. 하다못해 길거리 꽃집이나 노점상 국화다발의 유혹적인 향기도 새삼 깊어진 가을을 깨우쳐 준다.

흔히 국화는 높은 절개의 상징으로 칭송된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거나 고고한 군자로 비유되면서 그 품성과 자태를 우러른다. 매화는 청우(淸友), 연꽃은 정우(淨友)인데 반해 국화는 가우(佳友)라고 일컫는다. 국화는 모란 작약처럼 농염하게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고 매화나 연꽃처럼 청정하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듯 늠름한 기상이 아름답다. 찬바람과 서리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서서 우아한 꽃을 피워내는 오연한 기개다. 바로 의리와 절개의 표상이 되는 이유다.

국화를 누가 은일(隱逸)의 선비에 견주었던가. 주염계(周廉溪 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에서 연을 군자, 모란을 부귀, 국화를 은일로 빗대면서부터였다

고금을 통해 국화에 얽힌 전설과 사연, 시가나 서화가 너무나 많으니 어찌 그것을 필설로 다 이르랴? 하지만 국화는 일찍이 도연명(陶淵明)이 “동쪽 울타리 밑 국화를 캐다가 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거론한 이후 군자의 상징이 됐다. 도잠은 직접 국화를 노래하지는 않았으나 도리어 한결 더 자연스러운 정취를 드러낸다. 자연주의자 도연명의 은둔생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았다. 그래서 국화=도연명=은둔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화는 바로 이 시구 때문에 은일의 멍에를 뒤집어씀으로써 진면목이 가려진 점도 없지 않다.

고려의 사직(社稷)을 지키려 순절한 포은 정몽주도 국화를 무척이나 아꼈다. ‘국화탄(菊花嘆)’이란 장편시 가운데 몇 구절을 간추린다.

꽃은 비록 사람 말을 이해 못해도 그 마음 꽃다움을 내 사랑하네.(花雖不解語 我愛其心芳)

평생에 술을 입에 안 대었지만 널 위해 한 잔 술 드노라.(平生不飮酒 爲汝擧一觴)

평생에 입 열어 안 웃었는데 널 위해 한바탕 웃어보리라.(平生不啓齒 爲汝笑一場)

국화야 너는 내가 아끼는 바니 도리꽃은 풍광이 곱기만 하네. (菊花我所愛 桃李多風光)

이 국화시에는 포은 선생의 심경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때문에 국화가 충신에게 사랑을 받고, 충신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모두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국화가 장수를 뜻하는 경우도 많다. 예문유취(藝文類聚) 풍속통(風俗通)에 남양국수(南陽菊水) 고사다. 국화밭을 통과해서 흐르는 물을 마셨던 동네 사람들이 장수했다는 얘기다.

하여 국화를 층층이 그려놓은 그림은 고수(高壽)요, 국화가 역시 수(壽)의 뜻을 지닌 바위에 얹혀 있는 그림은 익수(益壽)를 상징한다.

오늘날 진보한 원예술은 온갖 국화 품종들을 다 만들어 냈다. 꽃피는 시기만 보더라도 거의 사계절 피어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을 국화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국화라면 역시 추국(秋菊)을 떠올리게 된다. 하여 “가을 국화는 어여쁜 빛깔을 띠네.(秋菊有佳色)”라고 노래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국화꽃 향기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동아리 선배 여인을 사랑했으나 가족을 잃은 아픔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는 선배로 인해 속앓이를 한다. 그러다 어렵사리 여자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만 여자가 암에 걸려 그 남자의 품속에서 죽어간다는 애절한 내용이 줄거리다. 요절한 우리 고장 출신 영화배우 장진영씨가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화 제목은 느낌은 좋았을지라도 적어도 어법상으로는 잘못됐다. ‘국화 향기’하면 될 것을 ‘국화꽃 향기’라 한데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을 터이다. 그냥 국화 향기라면 왠지 깊고 그윽한 어감을 주지 않을 듯도 싶다. 국화꽃 향기라고 해야 말이 귓속에 쏙 들어와 느낌이 진하게 전해질 것만 같다. 그것이 우리네 말 습관에 따른 감흥의 차이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국화꽃향기’는 ‘역전앞’이나 ‘처갓집’ ‘해변가’ ‘홀컵’처럼 익숙해져 있지만 분명 어법상 우스꽝스러운 형태다. ‘국화꽃’은 꽃이 거듭 겹쳤으니 고수(高壽)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깊어가는 가을, 국향을 맡으며 국향(특정회사 상표인 점은 양해하시압) 한잔 기울이는 것도 불역쾌재(不亦快哉) 아니런가.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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