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 에센바흐, ‘나의 삶, 나의 꿈’ 1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으시다 돌아가셨다 (내 평생의 죄책감이 되어 영원한 의문으로 남은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음악 교수로 재직하셨던 아버지는 나치에 의해 변두리 지방으로 추방 당하신 후 전장의 최전방으로 차출되셨다. 그리고 교전 중 총알받이로 전사하셨다. 그 뒤 나는 할머니께로 보내졌다. 1945년 1월 23일에 적의 맹습으로 피난을 떠날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1년 동안의 피난생활 뒤 할머니 역시 돌아가셨다.
12개월 후인 1946년 1월 31일, 나는 생후 5년간의 어두웠던 시간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동안 나를 항상 따라 다녔던 질병과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시간들로부터 구원해준 이는 발리도레 에셴바흐(Wallydore Eschenbach)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촌이었고 후에 나의 양어머니가 되었다. 뒤이은 긴 1년이란 기간의 회복기를 거치는 중 (당시 나는 괴로운 일들을 겪으며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나는 처음으로 음악을 듣게 되었다. 발리도레 에셴바흐는 피아노를 잘 치는 성악가이며 음악 선생이었다. 그녀는 밤 늦은 시간까지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시곤 하였다. 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수양어머니께서 내게 음악을 하고 싶은지 물으셨을 때 “네”하고 대답 하면서부터였다. 나는 내 자신을 진정으로 표현할 수 있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는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은 내게 표현수단의 기능이었다. 또한 음악은 그것을 넘어 사물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어린 아이에게 단순한 흥미거리로만 전락할 수 있었던 음악에 심취 하였고 삶에 대한 갈망은 음악으로 인해 다시 깨어나 내가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가 되었다. 마치 구원을 받아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발리도레 에셴바흐와 그녀의 음악(뒤에 나의 음악이 된)을 통해 나는 친어머니께 그녀가 잃어버리신 것들 중 일부를 영적으로 돌려드린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찾았으며 나는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나는 11세 때 처음으로 교향악단의 연주를 들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순회공연차 킬에서 베토벤 교향곡 4번과 5번, 그리고 그 두 곡 사이에 ‘대 푸가’를 연주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그들이 연주한 거의 대부분의 음들을 머리 속에서 들을 수 있고 마음의 눈으로 푸르트뱅글러를 볼 수 있다. 그가 가진 위대한 마법사의 매혹적인 풍채는 연주하는 음악가들 모두의 정열에 불을 붙이며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크게 감동 받은 것을 아시고 내가 지휘자가 되리라 결심하였다는 것을 즉각 아셨다. 어머니의 다소 침착한 반응은 내가 먼저 오케스트라의 구성 악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주일 후 나는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첫 레슨을 받았다. 내가 바이올린에 점점 더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귀와 머리, 그리고 몸과 너무나 가까이에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우리집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 친구들과 가족이 모인 실내악 음악의 밤을 열었는데, 그 중 나의 수양아버지는 아주 뛰어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 겸 비올라 연주자였다. 그래서 나 역시 짧은 기간에 가족 음악회의 일원이 되어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비올라를 연주하였다. (특히 비올라는 현악 4중주에서, 그리고 음악의 한 가운데에 위치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지만 나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소리가 그리웠다. 그래서 집 근처의 로마네스크 교회에서 그러한 소리를 대신할 수 있는 악기인 오르간을 찾았다. 나의 오르간 선생님이 병이 드시자 나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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