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 박용래 약전(略傳)
이문구
2
박용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가을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월간 현대시학사가 주관했던 ‘작품상’ 제1회 시상식이 열리는 신문회관 강당에 들어서면서, 나는 단상에 놓여 있던 두 송이의 꽃에 시야가 가려져 더는 발자국을 옮기지 않았다. 하나는 해설핀 울타리의 가녀린 들국화요, 하나는 여름 장마에 되살아난 장독대 옆의 엷은 백일홍이었다.
내가 백일홍 잎사귀에서 가난의 땟국을 엿보다 말고 시선을 옮긴 순간, 잔뜩 주눅이 들어 촌티가 뚝뚝 흐르던 들국화가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박시인이 나를 알아보고 얼결에 떠올린 반색이었다. 나는 그의 수상작품인 <저녁눈>을 먼저 알고 그제서야 시인을 찾아간 셈이었지만, 막상 시상식의 단상에 오른 것은 한 편의 시요, 그전에 읽은 <저녁눈>이 정작 시인의 얼굴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늦은 저녁에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에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에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에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붑비다.
나는 시상식이 끝나자 <저녁눈>을 외어가며 붐비는 시상식장을 빠져나와 붐비던 저녁때를 한참이나 걸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명색이 없던 한갓 문학청년에 지나지 않았으니, 중견 시인이 얼굴을 짐작해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나의 감격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나는 박시인을 마음으로 모셨다. 모시다니, 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떳떳지 못한 수작인가. 박시인에게는 필경 나 같은 것처럼 성가시고 주체스러운 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악몽 같은 한국문인협회의 이사장 선거를 비롯, 문단에 잡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를 단골로 찾아가 물리도록 볶으며 귀찮게만 굴었지 정녕 사람노릇 한번을 못해 본 터였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꺼려하는 내색조차 얼비치지 않았다. 나의 되잖은 행티나 같잖은 주접에도 눈썹 한번을 서슴거리거나 뜨악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는 짓이 가당치 않아도 짐짓 눌러보고 넘어가는 물렁한 성품이어서가 아니었다. 박시인의 정신은 본디 그것과 반대쪽에서 남이 우러러보도록 우뚝했던 것이다. 그는 하찮은 일에서도 경위를 어그려 눈밖에 나면 절대로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결 곧기로 대쪽이요, 못내 맑다 못해 여울의 물그림자가 그 버금가던 품성에 미루어보건데, 나의 버릇없는 억지, 본데없는 우격다짐, 소갈머리 없는 투정 따위를 오냐오냐 받자 하여 준 것은, 그것이었다. 다만 나를 아껴주려던 여린 인정 한 가지.
하지만 아끼는 후배라 하여 곁길로 벋놓이던 싹수까지 쉬쉬하고 덮어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한나절에 벌인 술판이 오밤중까지 갔던 자리에서
“박선생님은 호서(湖西)의 대표적인 시인이시니까……”
하고 무심히 지껄이며 무슨 말인가를 이으려 하였다가 벼락같은 호통소리에 고개를 못 들을 적이 있었다.
“야 임마! 한국의 대표시인두 선찮은디 호섯지방? 이런 싸가지 읎는 늠 보게. 야, 니가 원제버텀 이문구간디 그렇게 변했네? 워느 결에 벌써 그리 변헌 겨? 세월 참 이르다 일러……”
나는 아무리 질탕한 술자리라 해도 객적은 소리는 함부로 지껄일 수 없음을 뒤미쳐 깨달았거니와, 그 비슷한 핀잔과 지청구와 구박은 그 뒤로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