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 박용래 약전(略傳) 1, 이문구
*편집자 주: 이문구의 ‘박용래 약전(略傳)’은 박용래 시전집인 창비시선45 ‘먼 바다’의 부록에 있는 글입니다. 시집 ‘먼 바다’는 1984년 초판 1쇄가 나왔고 2008년에 초판 9쇄가 다시 나왔습니다. 9쇄도 왠만한 서점에서는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그만큼 박용래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특히 부록으로 실린 이문구의 ‘박용래 약전(略傳)’은 대단히 재미있을 뿐만이 아니라, 박용래라는 시인과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대로 옮겨 소개합니다.
박용래 약전(朴龍來 略傳)
이문구(李文求)
1
군자와 군자는 비록 세월이 다르되 길이 같고, 소인과 소인은 세상이 달라도 역시 한 무리일 뿐이라는 옛말이 있다.
인간이 물질에 대해서는 제법 인간다운 행세를 하면서도,한 어리인 인간에 대해서는 짐승 노릇이 도리인 줄로 아는 세상을 지금으로써 증명하니, 옛말이 도리어 오늘에 이르러 그 뜻이 나타났음은 실로 딱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하여 삶의 줏대로 삼고, 타고난 숨이 다 되면 하릴없이 자리를 뜨되, 일생을 지녀온 고운 얼까지도 남에게 물려주고 가던 대인(大人)이 드물지 않았음을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런 난세에도 하늘은 높으나 고개를 숫여야 하고 땅이 넓어도 길이 아니면 얼씬을 말아야 한다고 이르던 한 아름다운 이가 있었다.
박용래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그의 작품을 모르던 이가 없고, 죽어서는 그의 이름을 지울 이가 없을 터임에 세상은 그를 일컬어 시인이라 한다.

사진: 박용래 시인
일찌기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했던 그는, 꽃그늘과 풀그늘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능히 알면서도 셈은 남과 같지 않았으니, 마침내 몸소 자기 곳을 찾아 오십추(五十秋) 남짓 되는 생애를 초야에 묻혀 다하였다.
그는 조상적 이름의 풀꽃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 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더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詩篇)의 행간에 마련해 두고 살았다. 그는 나물밥 30년에 구차함을 느끼지 않았고, 곁두리 30년 탁배기에도 아쉬움을 말하지 않았다. 달팽이집이라도 머리만 디밀 수 있으면 뜨락에 풀포기를 길렀고, 저문 황토길 오십리에도 달빛에 별밭이 어리면 뒷덜미에 내리던 이슬조차도 눈물겹도록 고마와하였다.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情恨)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