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현이 없는 거문고가 떠오른다. 줄이 메워진 거문고도 다루기는 만만치 않다. 헌데 느닷없이 웬 줄 없는 거문고란 말인가. 줄 없는 거문고는 작금 정신없이 바삐 사는 우리들이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생각거리다.
줄 없는 거문고는 오래전부터 얘기돼 왔다. 장자의 도에서는 ‘무현금(無絃琴)’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몰현금(沒絃琴)’이라고 했다. ‘무(無)’나 ‘몰(沒)’이 같은 뜻이니 결국은 같은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줄 없는 거문고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 이를 인격수행과 더불어 풍류로 즐기게 된 정신세계는 무엇일지…
거문고는 예로부터 선비들에게 사랑받는 악기였다. 아니 단순한 소리 도구를 넘어 풍류의 필수요소로 대접받았다. 그저 악기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이상의 정신세계에 대한 심오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때 아닌 풍류 타령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서울 불바다’를 외치며 북한이 저처럼 그악스럽게 대드는 형편이니 참으로 한가한 풍류타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디 풍류가 그리 간단하고 녹록한 수준의 니나노 타령은 결코 아닐터.
일찍이 고운 최치원선생이 선화(仙化)하면서 일깨워주지 않았던가. 고운은 난랑비 서문에서 현묘한 도를 일러 풍류라 한다고 못박은 바 있다.
“우리나라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는데, 이것을 일러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이미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뭇 인생에 접하여 그들을 (참 사람되게) 감화시킨다.”
이처럼 본디 풍류는 깊고도 넓은 뜻이 담겨 있었다. 감히 고운 선생의 높은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언뜻 알아챌 듯도 싶다. 오늘날 비록 풍류가 한낱 헛되고 도락적인 것으로 타락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그 정신의 뿌리는 높고도 멀다.
거문고를 ‘금(琴)’이라고 하는 것은 “군자가 바른 것을 지켜 스스로 금(禁)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면 바른 뜻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심금(心琴)을 울린다’고 일컫는다. ‘풍속통의’는 ‘성현군자들은 거문고를 타면서 항상 사악한 것을 스스로 느껴 조심했다’고 전한다.
사마천도 ‘사기’ 공자 세가에서 거문고를 언급했다. “공자가 사양(師襄)에게 거문고 타는 법을 배웠는데, 거문고를 배우는 것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심금과 같은 맥이 통하는 대목이다. 또한 예기의 ‘악기(樂記)’편에 ‘군자와 소인이 다른 것은 군자는 악도를 얻으려는 것이고 소인은 악음을 욕심내는 것’이라고 했다. 즉 사람됨의 그릇 크기가 결국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가름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음악은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음악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풀이했다(‘논어’ 옹야)
이처럼 옛 선현들이 거문고를 즐기는 뜻은 단순한 기예의 연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의 도를 배우고 터득하는데 있었다.
고려나 조선 선비들의 거문고와 함께하는 풍류도 항상 공자의 악도(樂道)와 장자의 무현금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아가 불교의 ‘몰현금’을 비롯해 거문고를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사이 같은 벗을 구하기 위한 인격수양의 도구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마음에서 무현금을 타면서 스스로 취했다.
선비들의 이런 취향을 잘 드러낸 이가 이규보다. 시, 거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자호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거문고는 악의 으뜸이라, 군자가 항상 사용하여 몸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군자가 아니지만 오히려 거문고 하나를 간직하고 줄도 갖추지 않고서 어루만지며 즐겼더니. 어떤 손님이 이것을 보고 웃고는 이어서 다시 줄을 갖추어 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길게 혹은 짧게 타며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옛날 진나라 도연명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두어 그에 의해 뜻을 밝힐 뿐이었는데, 나는 이 구구한 거문고를 가지고 그 소리를 들으려 하니 어찌 반드시 옛 사람을 본받아야 하겠는가?” (동국이상국집)
그는 독도잠시(讀陶潛詩)에서 거듭 도연명을 찬했다.
我愛陶淵明 나는 도연명을 좋아하니
吐語淡而粹 토해 놓은 말은 담박하고 순수하다.
常撫無絃琴 항상 줄 없는 거문고를 어루만지니
其詩一如此 그 시도 또한 이와 같구나.
至音本無聲 지극한 음률은 본래 소리가 없으니
何勞絃上指 어찌 피곤하게 거문고 줄에 손을 쓰며
至言本無文 지극한 말은 본래 수식이 없으니
安事彫鑿費 어찌 꾸밈을 일삼아 말을 허비하리오
平和出天然 평화로움은 천연에서 나오니
久嚼知醇味 오래 씹을수록 변하지 않는 맛을 느낀다네
서경덕은 무현금명(無絃琴銘)을 썼다. “거문고의 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 그 현을 타는 것을 쓰는 거라네 / 음률 밖에 울리는 궁상(宮商 )소리를 / 내가 그 참모습을 깨달았도다 / 소리로써 즐기는 것이 아니라 / 음악의 소리를 즐기는 거고 /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 거라네 / 음악 듣기 잘 하였던 저 종자기는 / 어찌하여 내 거문고 소리 안 듣나 ” 라고 슬쩍 종자기를 들먹인다.
여러 사람이 함께 풍류를 즐길 때는 반드시 시와 술이 함께 따랐다. 하지만 혼자서 즐기는 풍류에는 거문고가 필수였다. 이처럼 옛 성현들이 거문고를 가까이 한 뜻은 한낱 기예 연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터득하는 데 있었다. 불교에서도 마음을 닦는 것이 구도의 핵심이지만 마음을 줄 없는 ‘몰현금’에 비유해 진심을 구한다.
상식적으로 현이 없는 거문고는 당연히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현을 갖춘 거문고는 그 자체로 소리를 낼 수 있어도 악음이 유한할 수밖에 없다. 해서 무현금은 마음을 통해서만 소리를 느끼는 것이 된다. 또 그 소리는 선악을 넘어 순수한 마음자리와 닿아 있기 때문에, 참으로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그 악음을 울리거나 들을 수 없게 된다. 불교수행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몰현금에 비유해 심금이라고 했다.
백아와 종자기의 경우를 보자. 거문고 명인인 백아가 고산(高山)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가 “좋구나,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도다”라고 했다. 유수(流水)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좋구나, 양양(洋洋)하여 강하(江河)와 같도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이심전심을 말할 것 아닌가. 그런 사이니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숨어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이 도저한 경지를 범부들이 어찌 꿈꾸겠는가. 하지만 아예 딴 세상으로 치부해버리면 그 길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 무엇보다 오늘의 이 급박한 현실 속에서 일국의 경세와 제민을 논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여! 부디 옛 성현들은 못 따라갈망정 선비들의 마음가짐만이라도 닮으려고 해봐 달라. 그리 할 위인이 얼마나 될지는 알 길 없지만 요즘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은 백아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단적으로 신념이랍시고 뚱딴지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그렇다. 그런 이에게 거문고라는 성찰의 도구가 귀에 들릴 리 만무하겠지만 한마디 안할 수 없다.
그가 청문회에 준비해 온 것은 소명자료가 아니라 “청렴하게 살아왔다”는 말뿐이었다. 한술 더 떠 긴급 기자회견까지 자청했다. 그는 5분여 동안 딱 하고 싶은 말만 한 뒤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했다. 언론이 자신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전달하기만 하면 국민의 이해를 구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처럼 빗나간 신념이야말로 장관 후보자로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기회를 얻고 싶었다면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의혹을 제대로 해명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국회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도 무산됐지만 박 대통령은 그 후보자 임명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국회와 여론이 아무리 반대해도 ‘내 뜻대로 한다’는 대통령의 고집과 장관 후보자의 철면피가 맞아떨어진 셈인가. 국방 책임자의 오도된 신념이 자칫 국민을 위기에 빠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예전엔 초등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1·2위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김연아와 유재석이라고 한다. 다들 그렇게들 말한다. 초등생들의 자발적 선호를 이리저리 재고 다듬을 필요는 없다. 요즘 세상의 풍속이 그리 변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그 흐름을 기성세대들조차 무턱대고 따라가는 것도 요량없는 일이다.
하기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 속에서 풍류가 현묘하니 운운하면서, 심금이니 무현금이니 어쩌고 하는 것이 우습다. 아마도 시대를 약삭빠르게 못 사는 벽창호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과 같이 어지럽고 혼돈스러운 시대에 내면세계로 침잠하고 사악하고 거짓된 것을 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거문고, 그것도 줄 없는 거문고를 헤아리는 것이 매우 요긴하다. 여기서 무현금이 반드시 거문고만은 아닌 것은 정한 이치다. 각자가 갈고 있는 마음밭에 마음으로 뿌리는 씨라면 될 터이다.
‘채근담’의 잔잔한 타이름은 언제고 담박하면서도 서늘하다. 오늘같은 어수선한 시절, 이런 매섭고도 산뜻한 훈계를 뉘라서 알랴.
“세상 사람들은 고작 글자 있는 책(有字書)이나 읽을 줄 알았지 글자 없는 책(無字書)을 읽을 줄은 모른다. 유현금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