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볼 만한 일화 하나로 얘기를 시작한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에드워드 루빈에 관한 에피소드다. 루빈은 고교졸업반 때 하버드와 프린스턴 두 대학에 모두 지원했다. 그는 하버드에는 붙었으나 프린스턴에는 떨어졌다. 4년 후 루빈은 프린스턴 입학처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 대학이 퇴짜 놓은 학생 중 한 명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하버드를 최우등(summa cum laude)과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 ‘학문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길잡이’란 뜻의 라틴어. 우수한 성적의 미국 대학생 및 졸업생의 클럽 또는 그 회원을 말함.) 회원으로 졸업했습니다.”
입학처장이 답신을 보내왔다. “매년 우리 프린스턴대학은 하버드대학도 그런 훌륭한 학생이 다닐 수 있도록 성적 우수 학생 중 일정 수를 불합격시키는 것이 우리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루빈의 우쭐거림에 대해 재치있는 한 마디로 콧대를 꺾어버린 그 처장의 센스가 돋보인다. 이런 루빈의 태도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달리말해 냉철했다기보다 들떴거나 자만했다는 말이다.
4월은 ‘과학의 달’이다.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과학의 날의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최초의 ‘과학의 날’은 4월 19일이었다. 그 날짜로 정한 이유는 바로 진화론의 주창자인 찰스 다윈이 그날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다윈이 누구던가. 그 당시 인류의 과학이론과 사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진화론의 주창자가 아닌가.
1934년 한국 과학기술자와 민족주의 인사들이 ‘과학데이’를 정하고 민족 과학기술의 진흥을 위한 대중적 행사를 벌였다. 당시 발명학회 전무 김용관의 제창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고 과학기술보급회를 창립한 김용관은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를 목표로 1934년 4월 19일에 과학의 날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는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려 민족의 힘을 키우고 독립을 하고자 하는 대대적인 국민계몽운동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민족운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했다. 주창자인 김용관 선생은 감옥에 투옥됐다. 일제의 저지로 잠시 중지되었던 과학의 날은 광복 후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가 탄생되고, 21일로 변경돼 다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우리의 모든 생활방법을 과학적으로 개선하자!” 당시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의 날 기본정신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 정신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과학의 날’을 기념한 지도 꽤 오래됐다. 그런데 과학의 날은 꼭 과학자나 과학도에게만 의미 있는 날이어야 하는지 짚어보자. 대개는 ‘과학’ 하면 낯설고 어렵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 일쑤다. 하지만 과학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인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를 생각한다면 과학이 얼마나 유익하고 위대한가. 또 과학이 생활과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콩이 메주가 되는 것. 우유가 치즈가 되는 것도 과학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볼펜의 용수철 하나, 입고 있는 옷,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는 스마트폰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과학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침대가 과학이라는 우스개 광고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생활 가까이 있는 과학을 너무 어렵게 여기면서 등한시 하는 게 현실이다. 과학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나아가서 과학이 발전한 나라가 강국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명한 현실이다.
지구 표면에서 햇빛을 받는 쪽은 낮이 되고 어두운 반대쪽은 밤이 된다. 낮과 밤의 경계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는 물론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하기 때문이다.
지구는 남극과 북극을 잇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데 자전축은 공전궤도면에 대해 23.5도 기울어져 있다. 지구를 북극에서 바라봤을 때 시계반대방향(서쪽에서 동쪽으로)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볼 때 태양은 동쪽 하늘에서 뜨게 된다. 하여 우리나라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독도가 된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낮과 밤의 경계선은 계절에 따라 변한다. 이 기울어진 23.5도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계절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23.5도를 밝혀내는 노력이 곧 과학의 힘이다. 그런 과학의 근거 없이 자연을 이해하고 풀이가 가능할까? 그것이 미신이요 터무니 없는 맹신의 빌미가 된다.
지구는 1시간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15도씩 회전한다. 지표면의 어느 한 지점에서 보면 자전이 진행되면서 점차적으로 태양의 윗부분 수평선에 접하게 되고 곧이어 수평선 위로 태양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이 순간이 일출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바라보면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24시간을 기준으로 한 바퀴를 회전하는 자전을 하고 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태양빛이 지구의 대기에 굴절돼 어렴풋이 태양빛이 느껴지는 순간을 여명(黎明)이라고 한다. 여명부터 일출 전까지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상태를 박명(薄明)이라 부른다. 아울러 해가 진 뒤 하늘에 잠시 밝고 푸른빛이 남아 있는 상태도 박명에 해당된다. 그 중에서도 일몰 후 박명의 끝을 박모(薄暮)라 일컫는다. 지구에서 바라본 태양의 위치에 따라 보자면 결국 하루는 자정–새벽–여명–박명–일출–아침–낮–저녁–일몰–박명–박모–밤–자정의 순서로 진행된다.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달돼 쇄빙선이 남극과 북극의 바다를 누비고 있다고 해도 항해사들은 가슴을 졸인다. 남극과 북극에 가까워질수록 많은 항해사들은 작은 얼음덩어리조차 결코 쉽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바다 밑에 그야말로 거대한 무서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 작은 얼음덩어리가 빙산의 일각임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렇듯 무서움을 감추고 있는 얼음덩어리의 비중이 곧 0.917이다. 물의 비중이 1이므로 유빙은 바로 그 거대한 몸을 물속에 감추고, 인간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0.917은 얼음의 비중이다. 물의 비중은 1이므로 얼음은 물보다 가벼워 물에 뜨게 된다. 빙산은 91.7%가 물 속에 있고 겨우 8.3%만 물 밖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많을 경우,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빙산의 일각을 입에 올린다.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타이타닉호는 비운의 유람선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처녀항해에서 침몰했고 그 당시 가장 큰 배였고, 또 최고로 호화로운 여객선이었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점 등등.
타이타닉호는 1911년에 제작된 당시로서는 최고로 호화롭고 가장 큰 여객선이었다. 인간의 기술력을 망라한 걸작품이라는 자부심으로 1912년 미국으로 첫 항해를 나섰다. 하지만 빙산이라는 자연의 힘을 가볍게 본 결과 1513명의 사망자를 낸 최고의 해난 사고를 맞았다.
안개 낀 북대서양을 항해하던 타이타닉호는 물위로 나타난 조그만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물밑에 감춰진 엄청난 크기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다. 또 구명정으로 옮겨 탄 사람들조차 거대한 배가 가라앉으며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말려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무리한 항해를 하다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 결과였다.
인간은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아니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 혼자만의 생각과 욕망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그런 욕망이나 속마음이 자기 안에서 숙성되지 못하고 표면으로 드러나 자신을 짓누르거나 남을 괴롭히기도 한다. 대체로 그런 속마음과 욕망은 선한 모습이기 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악마성과 추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여 인간은 바로 0.917의 비중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침내 얼음이 녹더라도 물의 높이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과 인간의 욕망은 빙산의 감춰진 몸통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달력을 보자. 3월 14일은 무슨 날인가. 많은 사람들이 화이트데이로 답하기 십상이다. 물론 틀리진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파이(π) 데이다. 바로 자연에서 가장 경이롭고 미스터리한 상수 중의 하나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파이(π, pi)는 행성의 궤도, 오로라의 색깔, DNA의 구조를 기술하는 식에 나타난다. 파이의 값은 이밖에도 많은 다양한 곳에 사용된다. 아마도 아무리 발달한 게 현대수학이나 현대과학이라고 할지라도 파이를 빼거나 외면하고는 근본틀마저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파이를 계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파이는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파이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 또는 ‘페리메트론’의 첫 글자를 딴 것이라고 한다.
윌리엄 존스는 기호 파이의 사용을 제안했다.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π로 표기하는 것이다”
파이(π)는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무리수이다.
수퍼컴퓨터는 소수점 아래 2조 7천억째 자리 이상까지 파이값을 계산하는데 성공했고 여전히 계산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소수점 이하 몇 자리까지 외우는가 내기를 하기도 했다. 물론 재미삼아 벌인 호사취미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 수학이나 과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존엄하게도 파이(π) 상수다. 이제부터 3월 14일은 화이트 데이보다 먼저 파이(π) 데이를 기억해 주길…
언젠가 사변과 문장이 뛰어난 석학 이어령이 이렇게 말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예술이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결국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풀이를 빌려온다면 과학적인 태도와 판단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랄 수 있다.
요즘 세상이 어지럽다. 굳이 위정자나 정치인들은 탓하기조차 염증이 난다. 도나캐나 엉터리 궤변과 혹세무민의 참언으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나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가을 산천에서 진달래가 피기를 원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자 그러니 애먼 우리네 김씨이씨들이라도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이성과 과학의 도움을 얻으며 마음을 추스리자. 그렇다고 머리 터지게 수학이나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과학의 위대함, 수학의 치밀함을 가슴에 담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말과 주장을 해보자는 외람한 요청이다. 4월이 간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