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51>하늘의 도는 옳은가, 옳지 않은가

앵무새가 아무리 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날짐승을 면치 못하고 성성이가 아무리 말을 곧잘 한다고 해도 짐승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예기 곡례(曲禮)편에 나오는 말이다.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앵무새가 아무리 교묘하게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고 해도 그것은 말이 될 수 없다. 때문에 결국 앵무는 여전히 새에 지나지 않는다. 성성이를 보자. 상상속의 동물이지만 사람과 흡사하다고 한다. 소리는 어린애 소리를 내며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 게다가 술까지 좋아한다니 거의 변종 인간이나 다름없다. 허나 성성이가 아무리 잘 지껄인다고 해도 결국 짐승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과 비슷하게 소리 내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처럼 술까지 마신대서 사람일 수는 없다. 짐승은 짐승일 따름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말재간이 좋고 번드르르하다고 해도 진정함이 없으면 믿음을 주지 못한다. 한낱 허울 좋은 허튼 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래서 믿음을 주지 못하는 말뿐인 사람들을 약장수라 일컫는다. 한데도 요즘 우리나라에는 속이 뻔히 들여다뵈는 흰 소리를 참 잘하는 정치인들이 쌔고 쌨다.


천도 시야비야(天道 是耶非耶). 천도는 옳은가 그른가 하고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로 하늘이 무심하다는 뜻이다. 이른바 하늘의 도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옳지 않은 것인가? 얄궂은 세상의 이치를 한탄하는 말이다. 사마천이 사기 백이열전에서 탄식했다.

백이와 숙제는 인()을 쌓고 청렴결백했으나 굶어죽었다. 공자가 사랑하던 수제자 안회는 등겨조차 배부르게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요절했다. 허나 저 유명한 도적 도척(盜跖)은 많은 사람을 잡아 무참하게도 그 살을 회나 포를 떠 먹고, 갖은 악랄한 일을 다 했다 그렇지만 많은 악당을 거느리고 거부가 돼 장수했다. 세상은 품행이 옳지 못한 사람도 행복을 누리고, 훌륭한 행동을 하고도 오히려 역경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천도를 의심치 않을 수 있으랴. 사마천은 이런 세상을 얄궂다고 생각했다. 옳은 것이 꼭 승리한다고 믿는 것은 그저 허망함을 달래기 위한 자기위안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굶어 죽었다. (중략)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사기 백이열전’>

처음 부분에 인용된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말은 노자(老子)에 나온다.

삶의 정도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벌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별 탈 없다. 아니 외려 떵떵거리며 여봐란 듯이 산다. 사마천의 절규가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서 유난히 딱 들어맞게 들리는 것은 왜인가.


수행자와 창녀가 서로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공교롭게 같은 날에 죽었다. 죽어서 창녀는 천국으로 갔고 수행자는 지옥으로 갔다. 이들을 데려갔던 저승사자들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한 사자가 중얼거렸다. “어찌 된 거야? 뭔가 잘못 된 것 아니야. 일생동안 수도에 전념한 수행자가 지옥에 가다니.” 그러자 다른 사자가 망자들의 서류를 보며 답했다. “수행자는 성스러운 사람이었네. 하지만 그는 늘 창녀의 집을 기웃거렸어. 그녀의 삶을 부러워한 거지. 그녀의 집에서 매일 펼쳐지는 파티나 환락에 아주 관심이 많았지. 그 집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면 수행자의 마음은 자꾸만 흔들렸어. 게다가 창녀의 발에 매달린 방울이 딸랑거릴 때마다 그는 몹시 그녀를 그리워했다네. 경전을 읽고 수행할 때조차도 그녀의 집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흥청대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네.”

사자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창녀는 반대로 수행자의 집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했네. 이 지옥같은 생활을 언제쯤이면 청산하고 수행자처럼 고결한 마음으로 늘 예배하고 제단에 꽃을 올릴 수 있을까 고민했지. 이처럼 더럽혀진 몸으로도 경건하고 엄숙한 수행을 할 수 있을까, 수행자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번민했다네. 그러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니겠나?”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명성이나 외양은 진실인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명성이나 화려함은 왜곡돼 있다. 어떤 사람의 명성, 직업, 감투가 그 사람의 인간됨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외양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일 뿐이다. 벗기고 보면 그 사람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하여 겉으로 드러난 허울은 부질없는 허깨비일 뿐이다. 신이 있다면 진실을 저울질할 뿐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을 보자. 황하가 만 번을 꺾여 돌아도 끝내는 동쪽에 이르고야 만다는 뜻이다. 사대성을 배제하고 순수하게만 본다면 세상은 삿된 것은 거꾸러지고 바르고 떳떳한 것이 올바로 선다는 가르침 아닌가.

공자께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살펴보고 있는데 자공이 물었다. “군자는 큰 강물을 보면 반드시 살펴야 한다 하셨는데, 그 까닭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길 대저 물은 뭇 생명을 살아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않는다. 이는 덕()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옷깃을 여미고 이치에 따른다. 이는 의()로운 사람과 비슷하다. 또한 콸콸 흐르며 다함이 없다. 이는 도()를 터득한 사람과 비슷하다. 결행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듯 내달리매 소리를 내고 수백 길 계곡을 흐름에 두려움이 없다. 이는 용감한() 사람과 비슷하다. 헤아림에 있어서는 공평하니 이는 법()을 잘 지키는 사람과 같고, 그릇에 가득 차도 평미레질을 하지 않으니 이는 올바른 () 사람과 같다. 부드럽고 은근하게 도달하니, 이는 잘 살피는() 사람과 같다. 밖으로 나감으로써 안으로 들어오고, 앞으로 나아가매 깨끗해지니, 이는 잘 교화하는 사람(善化)과 같다. 수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니, 이는 마치 뜻()이 굳건한 사람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큰 물을 보면 반드시 살펴야 하는 것이다.” 순자(荀子) 유좌(宥坐)편에 나오는 얘기다.

아홉가지 물의 뜻이라. 공자의 가르침이 도저하고 한없이 크다. 요즘같이 조급하고 성마른 사람들이 그런 물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오늘날 물의 미덕을 갖춘, 군자라 부를만한 큰 인물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해도 공자와 같은 그런 위대한 스승들이 있으므로 해서 후생들은 그 가르침을 지표와 나침반으로 삼는다.

오랜 옛날 아직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는 어땠을까. 바다를 항해할 때에는 별자리를 관찰해 방향을 정했다. 북반구를 항해하다 길을 잃었을 때에는 북극성(Polaris)이 길잡이별이 됐다. 남반구에서는 북극성 대신 남십자성(Crux)이 길잡이가 됐다. 나침반이 발명되자 나침반이 길잡이별 역할을 대체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GPS(위성항법장치)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리더라는 사람들은 크게 뉘우치고 각성해야 한다. 과연 그들이 국민들의 나침반이나 길잡이별이 되는가 말이다. 되레 국민들이 그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역할전도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가. 딱하고도 참람스러운 일이다.

등산용어에 링반데룽(ringwanderung)이라는 말이 있다. 링이란 것은 말 그대로 고리 또는 둥근 원을 말하고 반데룽이라는 것은 걷는 것, 방랑하는 것을 뜻한다. 링반데룽은 등산 도중 방향감각을 잃거나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장소를 반복해서 맴도는 것을 일컫는다. 환상방황(環狀彷徨)이라고도 한다. 링반데룽 때문에 귀중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생에서 우리는 종종 링반데룽을 맞닥뜨린다. 열심히 살아서 이젠 형편이 좀 나아졌겠거니 했는데 항상 그 자리다. 어떻게든 앞으로 좀 나가야 하는데 가도 가도 제자리라다.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 밤늦도록 일해 봐야 최저생계 수준을 면키 어렵다. 잠 안 자고 부지런히 공부했건만 취직은 아직 머나먼 안개속이다. 세 번, 네 번, 열 번, 몇 차례고 취업시험에 응시해도 매양 한가지다. 나아진 건 없다. 원위치에 머물러 있다. 우리네 김씨이씨들은 그렇다 치자. 이 강퍅하고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든 헤치고 나아가달라고 권한을 위임해준 그 정치게이머들은 도대체 자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야말로 링반데룽 상태에서 체력도 잃고 의식도 혼미해져 아예 정신마저 놓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숭무레기들이니 겉으론 국민을 떠받드는 척 교활하게 가면 쓰고 우리끼리 즐기고 특권 누리면 된다고 거만을 떠는 것인가.

링반데룽만이 문제인 건 아니다. 화이트 아웃(whiteout)도 문제다. 극지방이나 겨울철에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면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져서 이상행동을 하게 되는 게 화이트 아웃 현상 때문이다. 화이트 아웃이 발생하면 지평선이 사라지고 기준점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돼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게 된다. 요즘 정치꾼들은 기준점도 없고 지평선도 없는 화이트 아웃 상태속에서 그저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떼거리로 넋빠진 방황을 계속 중이다. 그러니 지켜보는 국민들이 집단 아노미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같은 화이트 아웃이나 링반데룽은 비단 극지방의 사람이나 악천후를 뚫고 등산을 하는 전문등산가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종종 부딪치게 된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별의별 경우를 다 만난다. 시야가 툭 트여서 아무런 애로를 겪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야말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거나 짙은 먹구름에 뒤덮여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더듬이 잘린 곤충처럼 빙빙 맴돌며 고군분투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 마음속에는 그 길을 비춰주는 북극성이 필요하다. 마음속에 북극성을 간직한 사람은 비록 순간순간은 아무리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지향하는 바가 있다. 때문에 결국은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자께서 수만 번을 꺾여 돌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니, 이는 지와 같다(其萬折也必東, 似志)”라고 말한 이유다. 황하가 비록 지금은 굽이굽이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동해에 다다르고 만다는 그 뜻 말이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과연 어떤 별이 반짝이고 있는지.

한 개인의 삶은 100미터 달리기와 같은 단거리 경주가 아닐 터다. 오히려 마라톤 경기나 혹은 철인 3종 경기에 가깝다. 인생이 짧다고 하지만 결코 짧지 않다. 비록 지금 꾸불꾸불 돌아가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그 길이 지름길이었음을 깨닫게도 된다.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유명한 말을 떠올린다. “우승을 원한다면 100m 단거리를 뛰고 인생을 경험하고 싶다면 마라톤을 하라”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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