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한 사람이 스님, 무당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됐다. 중간 쯤 갔을 때 바람이 거세게 불어 배가 뒤집히려 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때 스님은 ‘아미타불’을 외우고, 무당 역시 ‘아왕만수(我王萬壽: 우리 왕이시여 만수를 누리소서)’를 외웠다. 그러나 의원은 오로지 ‘이중탕(理中湯)’만을 계속 외칠 뿐이었다. 이윽고 바람이 잠잠해지고 강을 무사히 건넜다. 여러 사람들은 의원에게 왜 살려달라는 기원 대신 처방 이름만을 외쳤는지 그 까닭을 물었다. 의원이 답하기를 “대개 배가 아프면 이중탕을 쓰는 것이 의가의 구급방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우리말로 배(舟)와 배(腹)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거였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물론 웃어넘기자고 하는 얘기다. 하지만 그 해학 속에서 재치와 가르침을 엿보게 된다. 우리네 삶에 고요한 물살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어쩌다가는 소용돌이를 맞닥뜨릴 때도 있다. 이럴 때 차분하고 냉철하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선비 강희안은 어려서부터 워낙 총명해서 두 세살 때부터 그 일대에서 유명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세종대왕의 처조카이기도 했다. 스승을 따라 학문을 익히는 과정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소과는 물론 대과도 단번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성품은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서 소란스러운 것보다는 고요한 것을 좋아했다. 맡은 바 업무에 언제나 신중하고 성실하여 자리가 비는 요직이 생기면 제일 먼저 천거되고는 했다. 그때마다 청렴하고 소박했던 그는 번번이 사양했다. 출세에 욕심을 내지 않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그 연유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출세하거나 구차해지는 것은 다 정해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벼슬을) 구한다 해도 얻지 못하고 사양한다 해도 피하지 못합니다. 혹 분수에 지나치게 되면 재앙이 뒤따를 것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서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요구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대답은 그의 성품을 잘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심장함도 담고 있다.
강희안은 세종이 정인지 등과 창제한 정음 28자를 해석하는 작업,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작업,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이는 작업 등 세종대왕이 문맹인 백성들을 위해 지식을 보급한 대형 프로젝트에 뜻을 함께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강희안도 살얼음판 같은 혼란스러운 정권교체기에 단종 복위운동에 관련한 혐의로 신문을 받기도 했으나 큰 화는 면했다. 후에 다시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문이 계속 올라갔다, 그러나 그의 성품을 아는 세조의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강희안의 자세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정치와 그에 관련된 인간들의 정치적 욕망과 배신을 다 겪고 나온 것이었다. 출세에 집착하기보다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려는 마음이었다. 그 심사는 그의 그림 ‘고사관수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강희안은 일찍이 시(詩)⁃서(書)⁃화(畵)가 독보적 경지에 이른 삼절로 인정받았고 세종과 세조의 옥새에 들어갈 글을 쓸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글씨나 그림을 남기는 것도, 시를 세상에 발표하는 것도 꺼려 화첩이나 문집을 만들지 않았다. 강희안에게 그림이란 스스로 깨닫는 마음의 수양과정이었을 뿐이었다. 하여 그 이상으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필묵놀이가 심신수양이고 심신수양이 필묵놀이였던 그가 붓에 먹을 묻히기까지 얼마나 심사숙고했으며 얼마나 신중하게 한 획 한 획을 그었을지 조금은 알 듯도 싶다.
중국이 국보 첫손가락으로 꼽는 곽희의 조춘도(早春圖 1072년)나 프랑스의 국보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6년)에 견주고도 남을 만한 솜씨의 그림이 있다. 바로 모나리자보다 먼저 그려진 그림,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이다. 이 그림에 대한 찬사와 경탄은 그림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도 이미 그 이름만으로 맞장구를 치게 만들 정도다.
안견은 안평대군과 가까웠다. 단종을 몰아낸 세조 이후에도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은 세인들의 관심거리다. 이에 대해 17세기 학자 윤휴는 이런 글을 남겼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아껴 잠시도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안견은 때가 위험스러움을 알고 스스로 떠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북경에서 사온 먹을 꺼내놓고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시키고 자신은 잠시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 가져온 먹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종들을 다그치자 계집종이 ‘안견 탓’이라고 했다. 안견이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는 듯 일어나자 품속에서 먹이 떨어졌다. 이에 안평대군은 크게 노해 그를 꾸짖어 내쫓고는 다시는 자기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 얼마 있다가 정난(靖難)이 일어나 안평대군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연루돼 죽은 사람이 많았다. 안견만이 홀로 화를 면했는데 이는 식견이 높고 생각이 깊었던 때문일 것이다.”
윤휴는 그리 봤고 그게 처신의 지혜일 수도 있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이 득이냐 절조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냐를 가를 필요는 없다. 그런 방식의 처신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두자.
일생을 울분과 절망 속에 살면서도 끝끝내 사관인 아버지와의 약속, 자신과의 다짐을 지킨 위대한 역사가가 있다, 그는 바로 사마천이다. 그 약속과 다짐은 거짓과 왜곡 없는 장쾌한 역사책을 쓰겠다는 절절하고 뼈에 맺힌 결심이었다. 궁형을 받아 억울하고도 통분을 감추기 어려웠던 감정을 그는 역사서술로 비장하게 삭혀낸다.
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 중에도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그 중 그의 소신과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손꼽을만한 좋은 문구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을 뿐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
여기서는 죽음을 언급했지만 목숨을 비롯한 처세 일반을 빗대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와 관련해 그는 충직한 장수들에 대한 황제와 그 충복들의 각박한 대우, 가혹한 관리들의 잔인함을 공격한다. 또 인정과 세태의 비정함, 특히 지배층의 삐뚤어진 기풍에 대해 울분과 절망을 깊게 표출한다. 마치 오늘날의 세상흐름을 고발하는 듯하여 감정이 그대로 빨려들게 만든다.
사마천은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을 때의 상황과 그때 당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통해 인간 세상의 가장 살벌하고 음침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강권(독재) 통치의 면모를 거침없이 폭로한다. 시류에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고, 권력자의 심기에 좌우되는 지배층에 대한 비분과 절망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흡사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는 인심과 세태의 본질을 고민한 결과 인간과 세상을 한 차원 높게 인식했다. 더불어 깊고 고통스러운 사색의 경험을 간직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그가 새롭게 인식한 삶과 죽음에 관한 통찰은 궁극적으로 오늘날 중심을 잃고 헤매는 정치가나 관료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안겨준다. 하지만 뒤틀릴 대로 뒤틀린 권력층이나 자본가 중 어느 누가 사마천의 얌심과 생사관, 도저한 가치를 제대로 수용하려고나 들겠는가.
맹자 역시 공자처럼 난세를 치세로 바꾸기 위해 한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패도에 이끌려 힘이 지배하고, 선이 짓밟히고, 악이 기세등등한 참담한 세상과 마주해야 했다. 맹자는 그러한 서글픈 심회를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맹자의 술회를 들어보면 공연히 서글퍼진다.
“왕이 지혜롭지 못한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은 없다. 비록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자라는 물건이 있다 해도 하루 동안 해를 쬐고 열흘 동안 차게 하면 자라날 수 있는 물건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왕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 기회는 드물다. 내가 물러나면 왕을 차갑게 하는 자들이 찾아오니 내가 싹을 트게 한들 무슨 일이 되겠는가?”
맹자마저도 당대의 통치자 주변에 설쳐대는 간신적자들을 한탄하고 있다. 아무리 빼어난 성현들이 황제나 제후에게 간하고 설파해본들 귀 얕고 줏대가 무른 그들에게 무슨 왕도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허탈함의 결과다.
그렇다 해도 맹자는 우리에게 끝내 가르친다. 삶을 구차스럽게 하지 마라면서 떳떳함과 의연함을 내세운다.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웅장(熊掌: 곰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개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포기하고 웅장을 얻겠다”고 말한다. 맹자는 또 덧붙인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사는 것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나아가서 맹자는 “원하는 것 중에 사는 것보다 더 심한(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며 “싫어하는 것에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환난도 피하지 않는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통절하게 가르친다.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한 게 삶에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곧 의(義)다. 오늘날 말해지는 ‘값싼 의리’와는 엄연히 다르다. 하여 사마천도 사람에게 한번뿐인 죽음의 갈래에 대해 태산과 깃털에 비유했을 터다.
‘맑’스는 맑음의 덩어리,/ 혹은 당원을 친 이념의 빵,/ 칼 막 쓰지 마라./반박이 불가능한 이 빵에/ 입을 대는 순간/ 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 촛불처럼 타오른다./ 너 이념 장사꾼이지?/ 칼 막 쓰지 마라./ 이 빵으로 인해 세상은 맑거나 맑지 아니하며/ 공평하거나 공평하지 아니하도다./ 오 내 몸에 흐르는 / 타락천사의 붉은 피,/ 너 칼 막 쓰지? ( 원구식, ‘맑’스)
아직도 세상이 좀 더 공평해지고 정의로워지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깜깜하고 아득하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구린내가 진동한다.
한명숙 전 총리 유죄확정 판결이 그렇고, 국정원의 대선개입이 그렇고, 서울시 직원 간첩조작 사건이 그렇다. 세월호 참사는 갈수록 깜깜한 먹구름 속이다. 도통 우리 현실에서 진실은 멀고 사술과 거짓만이 난무할 따름이다. 하여 오늘날 국민 앞에 군림하는 자들에게 원 시인의 싯구대로 “너희, 칼 막 쓰지 마라.”고 외치고 싶다. 하기는 화지누빙(畵脂鏤氷)일텐데 괜스레 헛심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곧 기름에다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다 조각을 하는 것처럼 수고만 하고 보람도 없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 뻔한데 말이다. 그래도 다시 외친다. “너희, 칼 막 쓰지 마라.”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