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에센바흐, ‘나의 삶, 나의 꿈’2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던 당시, 나에게 아주 훌륭한 피아노 레슨을 주시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최고의 피아노 교육을 위해 “보금자리”를 떠나야 할 때라고 느끼셨다. 함부르크에서 어머니는 저명한 엘리자 한젠 (Eliza Hansen)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배울 수 있어서 아헨에서 산지 몇 년 후 레슨을 받기 위해 다시 그 선생님에게로 돌아갔다.

아헨에서 나는 당시 독일의 최연소 지휘자였던 볼프강 자발리쉬(Wolfgang Sawallisch) 덕분에 광범위한 레퍼토리의 교향곡들을 접하며 그 안에서 “호흡하며 살 수 있는”기회를 가졌다. 그 도시에 사는 6년동안 그의 콘서트가 아니었다면 아마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쾰른음악대학교에서 한스 오토 슈미트 노이하우스(Hans-Otto Schmidt-Neuhaus)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아헨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문학과 철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쇼펜하우어와 헤겔을 읽었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에 관한 졸업논문을 썼으며 릴케(Rilke)의 두이노 엘리지(Duino Elegies)의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나는 시를 무척 좋아하여 직접 쓰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나에게 장애로 남았던 언어는 이제 새로운 모험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함부르크로 가서 대학에 진학하여 지휘,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을 한꺼번에 전공하였다. 나만의 첫 “자유”를 만끽하며 예술과 미학에 관한 나만의 사상들을 다지던 시절이었다. 테크닉을 “어떻게” 닦느냐의 문제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문제였다. 그 위에 음악적 구조가 “어떠하냐”의 질문이 남아있던 때였다. 이 시절에는 구성과 구조를 구체화하는 등의 사고가 나의 생각과 행동에 더욱 더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내가 소리를 들을 때 받는 느낌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가 일생동안 유일하게 참가한 ‘오디션’ 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앞에서 한 것이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나의 연주를 한 시간 동안 들었다. 그 후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도이치 그라모폰 (Deutsche Grammophon Gesellschaft) 레이블에서 녹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렇게 해서 카라얀과의 아주 절친한 관계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매우 중요한 배움의 시작을 의미했다.

나는 또 한명의 위대한 지휘자, 조지 셸(George Szell)에게도 은혜를 입었다. 그는 카라얀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지휘자였다. 그러나 셸의 가르침에는 스코어를 분석하는 데 카라얀의 가르침을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1969년에 셸은 자신이 지휘하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토록 초청하여 나의 미국 데뷔를 주선하였다. 나는 셸과 함께 열심히 연주했다. 피아노 리허설을 많이 가지면서 우리는 함께 일하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곧 그는 여러 도시의 여러 오케스트라 리허설, 그리고 리허설 후에 열리는 회의자리에 나를 대동하고 다녔다. 나는 발성법, 구절법, 그리고 명료함과 투명한 표현을 셸로부터 배웠다. 카라얀은 색채, 뉘앙스, 분위기의 변화를 가르쳐 주었다. 셸이 그림을 그렸다면 카라얀은 색을 입혔다. 안타깝게도 셸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지휘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휘는 1964년에 시험을 본 이래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지휘를 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나의 보디 랭귀지가 지휘에 적당할지, 오케스트라와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앙상블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의 생각들을 올바로 전달할 수 있을지, 나의 아이디어들이 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씨앗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깊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를 고정시키는 닻이 될 수 있을지 등 질문이 내 안에서 꼬리를 물었다. 결국 나는 지휘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브루크너 (Bruckner)의 교향곡 3번을 선택하였다(그런데 브루크너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주는 작곡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피아노를 위한 곡은 전혀 쓰지 않았다).

일은 모두 수월하게 잘 풀렸다. 나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비록 표면적이긴 하였지만 확고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수없이 많은 미세한 세부 사항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11세 때 내가 계획하였던 일들을 실천에 옮길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꾸준히 경험을 쌓은 후 나에게 처음으로 상임 지휘자로서의 자리가 주어졌다. 루트비히스하펜에서 나는 많은 교향곡들을 체계적으로 해석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 지휘 활동은 20세기가 배출한 최고의 리트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그와 함께 나는 슈만의 노래들을 전부 배웠고 당시 아주 좋은 동료였던 유스투스 프란츠 (Justus Frantz)와 슈베르트와 모차르트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곡 전곡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들 수십 곡을 같이 연주하였다(이 연주들은 도이치 그라모폰과 EMI에 의해 모두 녹음되었다). 연구와 탐구의 범위는 너무도 광대하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나의 집념 또한 강렬했다. 그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도전을 만들어 내었다. 바로 이 ‘도전’이란 말은 나의 별명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취리히에서 내가 담당한 역할은 다양하였다. 톤할레는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를 분리시켜 두 개의 독립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유럽의 문화 세계를 손에 쥔 이들의 정치적 음모의 전모를 목격하고 말았다. 문화는 인류를 이끄는 엔진임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는 형국, 즉 정치에 의해 문화가 이끌리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행정 수석 리하르트 바히 (Richard Bachi)는 권모 술수에 능한 사람들과는 달리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고 당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수석 지휘자로서의 직업이 없이 2년이 흘렀고 그 기간동안 나는 행정적으로 딱히 수행해야 할 의무가 없는, 자유를 즐겼다. “즐겼다”란 말은 나의 조언자였던 카라얀과의 대화에서 썼는데 그는 나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리고 그건 완전히 틀린 소리라고 단언하였다. 카라얀은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큰 건물을 지을 때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이 한 조각 한 조각 차근차근 맞추며 그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나가야 할 사람이라고 나를 판단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것이 카라얀이 나로부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내가 1988년 휴스턴 심포니의 음악 감독이 되자 카라얀은 그가 나에게서 기대한 바를 이루어 낸 것에 대해 서면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의 일이었다.

5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나는 뜻밖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훌륭한 조언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느 현명한 노인이 모든 삶의 주기는 숫자 7에 의한 것이므로 7 곱하기 7 이후에는 휴식을 취해야만 하며, 그럴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자신이 변하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G. 웅가레티 (G. Ungaretti)가 M’illumino dell’immenso 에서 말했듯이). 바로 이 1년동안 자유를 갖지 못했지만 나는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찾으며 마지막 남은 공황, 편집증,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의 삶의 목표가 먼 곳에서 나를 손짓하며 불렀다. 비록 놀라움과 기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평화로움의 연속인 듯 했다. 이 먼 듯, 그러나 아주 가까이에 있는 나의 목표는 점점 더 내가 그리워하던 “집”이 되었다. 이 집은 릴케의 7번째의 두이노 엘리지에서 나오는 유명한 말인 “우리의 내면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곳에도 세상은 없다” (The world exists nowhere but within us)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한때 갈 곳이 없던 아이를 위한 집이었다. 당시 보았던 그 목표는 나의 내면의 삶의 표출이었고… 그리하여 나의 내적인 삶을 음악에 맡기는 새롭고 놀라운 단계에 돌입한 것이었다.

이 발견과 함께 두 개의 아주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첫째,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형성되지 않고,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들어본 적도 없으며, 또 알려진 바 없는 그러한 작품들을 배우는 것이다). 둘째로,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끊임없이 늘어만 가는 젊은 인재들의 재능을 육성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현실에 의한 파괴로부터 젊은 음악가들 자신들과 예술을 보호하는 역할을 그들 스스로 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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