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이무기였다. 틀에 박히기를 거부했고 혁명을 꿈꿨던 이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옥하가옥(屋下架屋). ‘남의 집 아래에 다시 제 집을 짓고는 제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곧 남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유행에 민감하고 시류에 촉각을 곤두세워 거기에만 매몰되는 것을 멀리해야 한다는 꼬집음이다. 남이 시장에 간다고 해서 제 할 일도 없으면서 나도 시장에 가야할 일인가. 허나 요즘 너나없이 남 따라 시장에 가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박근혜대통령의 보잘 것 없는 외국순방이 그렇고 여야 대표의 현안대처와 정치행보가 그렇다. 국회의원 족당들의 민심읽기 또한 그렇고 허깨비같은 행정각료들도 그렇다. 온통 남 따라하는 이들 투성이다.
하지만 허균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때문에 현실의 혁명에 철저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이상이 불온한 현실로 나타나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통재라. 끝내 역적의 괴수가 돼 능지처참당하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언감생심 그 위대한 행동가의 깊은 심사를 요즘 하루살이 정치꾼들이 헤아리기나 하겠는가마는… 어쨌건 ‘남 따라 하기’로는 새로운 진전이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없다.
사람의 마음먹기와 믿음이란 때에 따라 천지 차이의 결과를 빚는다. 한번 보자. 잘 안 될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결과는 비극적으로 나타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노시보 효과다.
작동이 멈춘 영상온도의 냉동창고 안에서 얼어 죽은 선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 짐을 내린 후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돌아가는 한 포도주 운반선에서였다. 어떤 선원이 갇히게 됐다. 아무도 그가 그곳에 갇혀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창고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며 도움을 요청해도 대꾸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냉동창고를 찾아와주지 않았다. 점점 그 선원의 몸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발가락은 물론이고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져 갔다. 마침내 배가 리스본에 도착해서 냉동창고를 열었을 때 차갑게 얼어있는 그 선원을 발견했다. 선원의 손에는 ”내 몸은 점점 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죽어가고 있다“라는 종이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냉동창고 온도는 영상 19도였으며 그 안에는 먹을 것도 충분히 있었다는 점이다. ‘곧 얼어 죽을 것이다’라는 선원의 마음과 두려움이 실제로 그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간 결과였다.
노시보(nocebo)는 라틴어로 ‘나는 당신에게 해를 줄 것이다(I shall harm)’라는 뜻이다. 플래시보의 반대 경우다.
노시보 효과의 사례는 아주 많다. ‘설탕을 구토제로 알고 먹은 입원 환자의 80%가 실제로 구토 증상을 일으킨다’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또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의 건강에 대해 부정적인 믿음을 갖기 때문에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월등히 높아지는 경우도 입증됐다, 많은 의대생들이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질병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경우도 자주 발견된다. 이런 것도 모두 노시보 효과의 예다.
99% 무지방 고기와 1% 지방 고기가 있다고 하자. 둘이 다른가. 말을 달리 했을 따름이지 매 한가지다. 하지만 둘을 놓고 선호도를 조사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선택하라는 질문을 받으면 같은 고기인데도 전자가 더 좋은 것이라고 답한다. 심지어 ‘98% 무지방’과 ‘1% 지방 포함’ 중에서도 전자를 택한다. ‘98% 무지방’이 ‘1% 지방 포함’ 보다 낫다고 믿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다.
같은 이치로 볼 때 의사가 환자나 보호자에게 말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수술성공률을 놓고 보자. “수술 한달 후 생존률은 90%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수술 후 한달 내 사망률은 10%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차이가 있는가. 똑같은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술을 받은 환자 600명에 대해 200명이 살았다고 말하는 것과 400명이 죽었다고 말한 것을 비교했다. 그랬더니 전자는 72%가 수술을 선택했지만, 후자는 22%만이 수술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을까. 천만에다. 먼저 코끼리를 떠올린 연후에야 코끼리를 잊으려고 할 게 뻔하다. 이처럼 생각이란 모든 인간에게 어슷비슷한 모습으로 작용한다.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주장이다. 그의 말대로 상대편을 거꾸러뜨리려 상대를 부정하지만 결국 그것은 상대를 더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요즘 흔히 정치판의 협상이나 국제 외교관계에서 목격하는 꼬락서니들이 바로 그렇다. 요컨대 상대편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말대꾸 하나에서부터 대응행동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는 세상사를 다 이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 사고프레임에 갇혀 있는 포로들이다. 때문에 그냥 속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신이 진실로 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느 마을에 매독에 걸린 한 아버지와 폐결핵에 걸린 어머니가 살고 있다. 그 두 부부 사이에서는 4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나, 한 아이는 매독 균에 의해서 장님이 되었으며, 한 아이는 폐결핵으로 고생중이다. 다른 한 아이 또한 매독 균에 의해서 귀머거리가 됐다. 한 아이는 부모의 병으로 인해서 일찍 죽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또 임신을 한 거야. 너희들 같으면 이 아이를 낳겠나? 낙태를 하겠나?”
그러자 학생들은 입을 모아서 답했다. “당연히 유산시켜야 합니다. 부모님들의 병으로 인해 형제들도 이 모양이고, 부모 또한 나중에 태어날 아이의 고통조차 생각하지 않고 임신을 하다니 참 파렴치한 부모 아닙니까.”
교수는 학생들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대들은 악성 베토벤을 죽였다.” 학생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해결 할 것이라면 아예 해결하려 하지 마라.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고귀하다. 그 점을 명심해서 현명한 판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나라면 임신한 이 아이를 낙태할 것인가, 출산할 것인가 돌아봐야 한다. 그랬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매독이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였다.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던 악성 베토벤은 이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의 형제는 일곱이었으나 베토벤과 두 명의 동생만이 성인으로 자랄 수 있었다.
여러분이 만약 다음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면 누굴 뽑을 건가. 첫 번째는 부패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의사결정을 할 때 점성술을 참고하며, 두 명의 부인이 있고, 줄담배를 피우는데다가 마티니를 하루에 열 잔쯤 마시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회사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고, 정오까지 잠을 자는데다가 대학 시절에 마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으며, 매일 위스키 1/4병을 마시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전쟁 영웅이고 채식주의자이며, 담배는 안 피우고 가끔 맥주를 조금 마실 뿐이며 불륜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마치 세 번째 사람이 뽑히도록 문제를 만든 것 같다, 지도자를 뽑는데 이런 간단한 설명만으로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이런 반문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우선 내용만을 보면 첫 번째는 루즈벨트, 두 번째는 처칠, 세 번째는 히틀러를 두고 한 설명이다.
이런 조건에서만 뽑는다면 다들 히틀러를 뽑을 소지가 크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결과를 통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진리라는 눈부신 태양을 보려면 맑고 깨끗한 유리가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재(그을음)가 묻은 탁한 유리로 봐야 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매스미디어나 책이나 SNS를 통해 우리가 얻는 정보가 얼마나 잘못 된 것일 수 있는지를 유념해야 한다, 다시말해 늘 수동적으로 받는 정보만으로 선택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 캐낸 정보를 사용해서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유로운 생각을 통해 의사결정을 해야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일반적으로 혹은 매우 막연하게 말한 것을 듣고 그것이 자기에게 딱 들어맞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성격 특성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으로 받아들인다.가령 가족 중 어느 하나가 아픈 경우는 개개인 누구에게나 있는, 거의 공통된 일이다. 그런데도 “당신 집에 아픈 사람 있지요?”라는 점쟁이의 말을 자산의 처지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 바넘(Barnum)이다. 바넘은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사업가였던 그는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속임수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속아 넘어가기 쉬운 인간의 속성’을 바넘효과라고 부른다.
세상이 이렇듯 바넘과 같은, 뻔하지만 그럴싸한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과 주장으로 넘쳐난다. 이럴 때일수록 새겨 듣고 걸러 듣는 요령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불경을 많이 공부했다고 해서 저마다 고승대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죽도록 간다고 해서 기왓장이 거울이 되는 법은 없지 않은가(남악회양 선사가 제자 마조도일 대사를 일깨우기 위한 가르침). 수레가 구르지 않으면 수레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소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궁극은 수레가 굴러가는 거다. 돈오건 점수건 간에 갈고 닦는 수행이 있어야 깨우침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불경 공부는 그 중 한 가지 방편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공부하는 것만 공부라고 여긴다. 아니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다. 이처럼 맹목적인 믿음은 우리를 원하는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이끈다.
잔 다르크는 문맹이었으나 똑똑했다. 그러나 마녀사냥의 제물이 됐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신과 직접 소통했다는 게 죄였다. 재판관들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신의 은총을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예” “아니오” 모두가 그녀를 단죄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받지 않았으면 은총을 받기 바라며, 받았으면 신께서 은총을 유지해주기 바란다.” 신학자들은 그의 총명함에 경악했다.
얄궂고 고약하게 변해가는 세상인심이다. 잔 다르크의 총명과 슬기를 배워야만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세상이다. 허나 곱고 순일한 생각을 가진 이도 많을 터이니 걱정과 시름일랑 여의는 게 어떨는지.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