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
바로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을 두고 표현한 말이다. 돌연 무슨 뜬금없는 얘기인가. 그게 그렇지 않다. 참으로 기가 막힌 경지다. 궁궐 건물이 어떻게 그런 자중(自重)과 지족(知足)을 이뤘는지 짐작이 안 될 정도다. 왕이 머무는 곳이 궁이다. 그런데 가장 위엄이 깃들고 성대하게 지어졌으리라 생각되는 건물이 도를 넘지 않았다. 분수를 지켰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나아가되 그침을 알고 물러서되 스러지지 않음을 아는 수준이 아닌가. 모르면 모르되 그 슬기로움이 ‘중용’의 덕과도 비슷하지 싶다. 그저 딱 가운데 어중간하게 머무른 것이 결코 아니다. 어느 절대 수준을 추구하되 도에 과람하지 않겠다는 절제의 아름다움이다.
우리 역사는 정신적으로 그처럼 단정하고 세련된 품격을 지켰던 경험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즈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참으로 어수선하다. 어느 한 구석 바람 잘 날이 없다. 아마도 지난 역사의 훌륭한 가르침을 까마득히 잊고 살기 때문은 아닌가. 밝은 정신으로 맑게 살려는 이가 드물다. 그런 이들이 외려 세상에 뒤떨어진 자 취급을 받는다. 허나 그렇다고 일부러 손가락질 받고 지저분한 길을 택할 수는 없다.
옛날 한 고을 현령이 현자(仙人 浮丘翁)에게 물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현자가 말했다. “내게 여섯 자로 된 비결이 있네. 사흘간 목욕재계하고 오면 알려줌세.” 사흘 뒤에 가니 세 글자만 알려줬다. 모두 다 ‘염(廉)’자였다. “청렴이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현자는 타일렀다. “하나는 재물에, 하나는 여색(女色)에, 나머지 하나는 직위에 적용해보게나.” “나머지 세 글자는 무엇입니까?” “그럼 다시 사흘 동안 재계하고 오게.” 현령은 사흘 뒤에 다시 찾아갔다. “진정 듣고 싶은가? 나머지 셋도 염, 염, 염이네.” “그다지도 청렴이 중요합니까?” “이 사람! 들어보게나. 청렴해야 밝아지네. 사물이 실상을 숨길 수 없게 되는 게야. 청렴해야 위엄이 생기는 법이지. 백성들이 명을 따르게 될 것이야. 청렴해야 강직할 수 있다네. 그래야 상관이 함부로 하지 못할 것 아닌가. 이래도 부족한가?” 현령은 벌떡 일어나 공손히 절하고 염자 여섯 자를 허리띠에 써서 길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이 벗의 아들 영암군수에게 준 글에 나오는 얘기다.
이런 가르침과는 달리 청렴은 이제 무능과 순진함의 징표가 돼버렸다. 저축은행 대표는 고객이 맡긴 돈을 제멋대로 가로채질 않나, 공직자들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찰하지 않나 말이 아니다. 게다가 청빈과 개혁의지를 무기로 알았던 진보정당도 볼썽사납다. 일부 당원들은 민심에 어긋난 모순과 억지를 부리며 기성정당 뺨칠 만큼 권력다툼에 눈멀어 물러설 줄 모른다. 한 술 더 떠 종교인까지 설쳐댄다. 계율을 넘어설 정도로 극단의 길을 걷고 있다. 일부 불교 간부급들은 도박이 치매예방을 위한 오락이고 룸살롱 출입은 포교업무상 불가피하다고 억지논리를 편다. 언어도단과 불립문자를 가르친 스승들을 욕되게 만든다. 궤변과 뻔뻔함의 극치다. 이 대목에서는 국민들이 뽑아준 선량들이나 여타 공직자들 모두 한번쯤 돌이켜 봐야 한다. 과연 자신들도 떳떳한 청렴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불현듯 상앙의 ‘입목득신(立木得信)’ 고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가 상앙처럼 엄정하고 추상같은 ‘법대로’를 해야겠기에 말이다. 법집행에 관한 한 상앙만큼 진심을 다한 이가 드물다.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상앙의 말씀 또한 절절한 묘파였다는 것이 요즘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적도 없다.
차원은 다르지만 우리 사회의 얄궂은 현상 몇 가지도 이 기회에 반성이 필요하다. 아마도 넓은 뜻에서 낯두꺼움과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이 널리 퍼지게 만든 먼 원인이었거나 방조자였겠기에 그렇다.
날씨 좋은 날 평상복을 입고 학교 뒷산에 오른 인도에서 온 대학생의 생각이다. 1000미터도 안 되는 동네 뒷산 오르는 데 히말라야 갈 때나 입는 값비싼 등산복을 즐기는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 인도에선 히말라야에 갈 때도 안 입는 고급 등산복이 무척 신기했다.
프랑스에서 온 대학생. 한 잔 하자는 체육관 관장의 말에 회원들과 어울려 고깃집을 갔는데 정말 한 잔만 하는 줄 알았다. 삼겹살은 빈 속을 채우는 에피타이저에 불과했고 사람들은 삼겹살을 곁들여 소주를 마시는데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행은 2차 술자리로 옮겼는데 2차가 끝나자 누군가 말했다. 가볍게 입가심으로 맥주 한잔 더하고 가자고 했다. 그렇게 놀고 나서도 어떻게 다음날 멀쩡하게 출근하고 학교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대생은 찜질방에 감동했다. 한국드라마에서 봤던 찜질방을 지난해 겨울 처음 가봤다. 보석방, 산소방, 아이스방, 거기다 식혜와 맥반석 계란까지. “안 가보면 후회했을 거예요.” 그러나 탈의실에서 만난 한국 여성들은 낯설었다. “옷을 다 벗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너무 놀랐어요. 인도네시아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멕시코에서 온 대학생은 케이-팝에 빠져 있다. 다만 중학생 나이로 보이는 가수들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격렬한 춤을 추는 모습을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수들이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몰랐어요.”
모두 외국인들이 바라본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오는 낯설음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돌이켜봐도 조금 이상한 부분은 공감이 간다. 잘못은 아닐지라도 한번 곱씹어 볼 내용들이다. 이들의 시각을 우리가 돌아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의 자화상에 대해 너무나 둔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제대로 살펴보자는 뜻이다.
그렇다 해도 이즈음 우리사회는 곳곳이 나사가 빠져 있다. 아니 아예 그것도 무시한 채 미친 사회로 무섭게 치닫는 것은 아닌지 적이 심란스럽다.
토끼는 깡충깡충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물에는 꿩이 걸려 파닥거린다. 이 가르침은 시경에 나온다. 즉 악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활개를 치며 보란 듯이 설쳐대는데 도리어 정직한 사람이 죄의 함정에 빠져 애처롭게 바둥댄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아마 스스로 누리는 권력이 크다고 여기는 자들일수록 더 심히 뜨끔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다수의 우리 이웃은 죄가 없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