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55>청렴하되 상처를 주지 않는다

견현사제(見賢思齊)’라는 말이 있다.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게 되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안으로 자기를 되돌아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현인을 만나면 그와 같이 되려고 생각하여야 한다. 여기서 견()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이 아니라 내면적인 만남이다. 사제(思齊)는 배움에 대한 동경이며, 그것은 곧 본받음이다. 현인은 대상으로서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존재다. 그와 같아지기를 구한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참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어진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또 그렇지 못할 때는 그리 되기를 꿈꾼다. 어진 존재의 상징이 고전적 의미의 군자다. 군자는 본래 통치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귀족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으나, 공자 이래로 사회적 위치와 관련 없이 도덕적 품성이 높아 존경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후 군자는 유교 문화권에서 선비의 이상향, 즉 이상적인 인격체를 가리키는 말로 뜻이 전화되었다.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야 천리를 갈 수 있다. 곧 현인이나 군자가 되려면 그들의 행실이나 생각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죽고 나서도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제이름 팽개치기를 밥먹듯이 하는 하잘 것 없는 정치인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런 도저한 경지를 꿈꾸어보기나 했을까?

군자는 시냇물의 흐름이 쉬지 않는 것처럼, 연못이 맑아 자신이 비치는 것처럼 의연하다(川流不息 淵澄取映). 천자문에 나오는 말이다. 시냇물의 흐르는 물줄기는 단 한 순간도 끊임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의 행동도 멈추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군자의 행동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고 정정당당한데 그런 모습이 언제 어디서든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연못의 물이 고요하면 사물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군자는 그런 모습처럼 언제나 고요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자신의 내면의 기운이 그대로 비쳐져야 한다. 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출렁거리면 물이 흐려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없다. 이는 군자의 자세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라도 당당하고 광명정대하여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남들 앞에서만 군자인 체하는 사람을 두고 거짓군자(僞君子)라고 한다. 군자라면 밖에서의 나쁜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언제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해 둬야 한다는 얘기다. 그 울타리라는 것이 바로 학문이다. 학문은 다름 아니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가치판단과 행동의 위대한 스승 노자의 가르침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염이불귀(廉而不劌)좀 길지만 앞뒤 문장을 읽으면 이렇다.

통치자가 부정(不正)을 바로잡는 일을 답답할 정도로 (망설이면) 백성들은 순박해져 인정이 도탑게 되고, 부정을 바로잡는 일을 자세하게 따져 (실행으로 옮기면) 백성들의 심성은 이지러지고 인정이 부족하게 된다. ()는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곳이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끝까지 지속하는) 그러한 정(, 바름)은 없다. (왜냐하면) 바름도 바르지 못함(기이함)이 되고, 선함도 요사스러움(악함)이 되기 때문이다.(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

사람들이 (이러한 이치를 모른 채) 미혹한 지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이 (옳고 그름을) 구별해서 옳게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구별해서) 편을 가르지 않는다. 자신이 청렴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청렴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자신이 정직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정직해야 한다면서)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훌륭한 삶을 살지만, (남들에게 자신의 삶이 훌륭하다는 점을) 비치게 하지(자랑하지) 않는다.(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 <도덕경58>

이 가르침은 바로 자신이 바르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문제라는 점에 대해 이치를 들어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치를 대부분 사람들이 오랫동안 잘 모르고 이분법에 입각한 사고를 옳다고 여기고 있음을 우려한다. 또 이러한 이치를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에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개인인 자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하는 지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결국 이 이치를 제대로 알면 조직사회도 잘 다스릴 수 있고, 자신의 삶도 주변과의 마찰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대목을 이해하는 데는 프랑스의 학자 자끄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란 책이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저자 랑시에르가 모델로 인용한 인물이 있다. 바로 19세기의 대학 교수이며, 나중에 장관까지 지낸 조세프 자코트이다. 그는 1818년에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되었을 때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는 바람에 네덜란드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자코트였다. 그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자코트 자신은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는 한 권의 프랑스네덜란드 대역판만으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본인이 라틴어를 모르면서 라틴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등 어떤 교과든지 가르치는 교수가 된다. 흔히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보다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이 학생보다 몰라도 된다고 믿었다. 그는 학생에게 배워가는 방식을 택했다. 오늘날식의 표현으로 하면 학생주도적 학습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학생들은 자신들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 어휘를 찾아냈으며 그에 따르는 어미변화도 혼자서 찾아냈다.

자코트는 설명자로서 스승이 가진 체계의 논리를 뒤집었다. 그는 설명의 원리를 바보만들기의 원리라 칭했다. 자코트의 실험은 스승의 앎이 학생을 지도한 것이 아니며 자신(스승)이 모르던 것을 가르치는 실상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스승을 무지한이란 단어와 역설적으로 결합해 무지한 스승이라 불렀다.

결국 우리 일상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무의식적 전제 때문이다.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 옳고,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그릇된 전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은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대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지금까지의 직간접 경험에 의거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베이컨이 말하는 동굴의 우상이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경험의 한계에 따른 옳지 못한 앎을 우상이라고 표현한 것 아니던가.

이보다는 조금 낫지만 여전히 옳지 못한 지식으로 종족의 우상이 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니는 한계에 따른 옳지 못한 지식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근거로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제시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견해인 우상에 불과하다. 시장의 우상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팔면서 하는 말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곧 이것은 언어가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흔히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옛날부터 이러한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시의적절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대개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인용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반드시 옳다는 근거는 약하다. 이를 두고 베이컨은 극장의 우상이라고 일컬었다.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관람객들은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아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상에 의한 앎을 물리친 과학적 지식을 말한다. 우리가 그나마 옳은 앎이라고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것이 과학이다. 하지만 과학 중에서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연과학의 이론조차도 반증되거나 정상과학에서 밀려날 수 있는 것임을 것을 종종 봐왔다. 하물며 무지한 스승이거나 애국을 내세운 맹신적 통치자의 주장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노자는 2500년 전에 벌써 이것을 정치이론과 생활원리로 응용했다. 통치자가 자신이 하는 통치가 바른지 잘 모르겠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망설이면 백성들은 순박하고 착한 인격체가 되어 스스로 잘한다. 그렇지만 통치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것이 옳다는 무의식적 전제(신념)를 갖고 백성들을 감시하고 일일이 통제하면 백성들은 눈치를 보면서 그 통제에서 벗어날 것만 생각하고 자발성과 착한 심성이 부족한 인격체가 되고 만다. 과연 그렇다.

물론 감시하고 통제하는 통치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내린 자신의 판단은 나라의 재앙을 줄이고 복을 늘리기 위한 통치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확신조차 잘못될 수 있다. 설사 만에 하나 그 방법이 좋다고 하더라도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면 백성들의 자발성을 잃게 하는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이 점을 간과하는 통치자의 맹목적 확신에 문제가 있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통치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밀어붙여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만약 이것이 시행되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는 믿음에 차있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독선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놓여있다. 바로 자신이 하는 일이 옳기 때문에 자신은 선()이고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는 자를 악()으로 여기는 그 문제 있는 사고 말이다.

노자는 재앙()과 행복()의 상호 존재론적 관계를 제시함으로써 이분법적 사고가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화는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곳이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한 여름에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한 겨울에 여름이 시작되는데 여름과 겨울의 끝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재앙과 행복도 시작과 끝이 없으며 상호의존적이다. 노자는 이 이치를 궁구하여 정()과 부정(不正), 선과 악도 마찬가지임을 밝힌다. 즉 옳음 속에 옳지 못함이 있고 착함 속에 이미 악함이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통치자가 옳지 못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옳음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끝까지 지속하는 그러한 바름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어찌 통치자가 자신의 생각을 백성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노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고 남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무의식적 전제가 얼마나 문제인가를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통치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이치를 모르고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각 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강제하는데서 모든 투쟁이 벌어진다. 투쟁을 일으키는 자신의 생각이 미혹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노자는 사람들의 이러한 미혹된 생각은 오래되었고 견고하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자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신의 생각조차도 강제하기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대로 하도록 강제하면 똑같은 잘못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노자는 통치자로서의 삶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이 이치를 몸으로 실현했다.

그래서 노자는 자신이 어떻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러한 이치를 알고 몸으로 실현하는 성인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고 말한다. “성인은 자신이 (옳고 그름을) 구별해서 옳게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별해서 편 가르지 않는다. 자신이 청렴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청렴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상처 입히지 않는다. 자신이 정직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정직해야 한다면서)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훌륭한 삶을 살지만, (남들에게 자신의 삶이 훌륭하다는 점을) 비치게 하지(자랑하지) 않는다.”

자끄 랑시에르는 역사의 이름들이란 책에서 어떠한 문제를 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생각(사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모두 다 알고 있다고 냉소할수록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 아예 깡그리 무시해버린다. 정치가 썩었고 꼼수며 협잡이라는 사실을 다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다. 정치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정치를 비난하고 무시해버리면 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현재 경제가 최악의 침체를 겪고 있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한껏 걱정해도 누가 그걸 모르나?’하고 심통 사납게 내뱉으면 그만이다. 나라가 뭣이며 대통령은 또 누구며 경제부총리 따위가 무슨 용빼는 대책이라도 내놓겠는가. 내 삶은 이미 파탄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새삼 무슨 호들갑이란 말인가. 그저 이대로 놔둘 뿐. 어찌 될지, 무슨 대책이 나올지 뻔히 다 아는데 또 뭘 생각하고 고민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요즘 우리나라같은 풍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안다는 것은 냉소와 체념을 습관화하는 것 외에 아무런 힘이 안 된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뱃속 편하다. 어찌될지 모르므로 내일에 대해 최소한 궁금함과 실낱같은 기대를 가져볼 수는 있겠기 때문이다.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직사해놓고는 불법시위를 진압했다고 강변하는 것이 우리의 경찰이고 검찰이다. 그럴 줄 알았다. 한두 번 겪었던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60대 농민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도 우리의 안녕과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의 예지력은 어찌 그리 빼어난가. 시위를 벌이기도 전에 벌써 불법시위대라고 이름지우지 않았던가. 우리는 다 안다. 경찰의 그런 뻔한 대응을 이번에 처음 겪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판국에 인권이란 뭐 말라빠진 사치요 허영이란 말인가. 이같은 세상에 우리는 안온하게(?) 살고 있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을 때 우리는 삶에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고 내 삶과 주변을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다면 기대난을 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도가니속 아닌가. 취업을 아예 포기한 젊은이들이 그렇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그렇고 부의 상속이란 기회를 갖지 못한 흙수저 계층이 그렇다.

노자에 비해서 턱도 없이 생각이 얕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얼마나 우겼는가. 남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르도록 얼마나 강제를 많이 했는가. 여기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 대통령도 없고 정당 대표도 없다.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다.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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