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신성모독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전히 시칠리아 지방에서는 지금도 명예 살인이 자행된다. 마피아라는 집단의 힘을 동원해서 벌이는 무자비한 폭력 탓이다. 또 일부 종교 종파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마저 신성모독이라 하여 금기시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런 말이 안 되는 현실은 자신들이 끼고 있는 색안경을 더 짙게 만들 뿐이다.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에 몰입할수록 더더욱 편협되고 독선이 돼가는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역설과 부조리와 웃음거리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맹자에 나오는 한 한심한 남편의 자랑거리 얘기로 말을 시작하자. 묘사에 쓰고 남은 술과 고기를 얻어먹는 남자의 예다. 제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나가기만 하면 얼굴에 기름기가 돌도록 먹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돌아오곤 했다. 아내가 누구에게 대접받았느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자랑스럽게 부귀한 사람에게 대접받았다고 했다.
사내는 사실은 성묘하는 사람에게 가서 뻔뻔스럽고 염치없게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구걸했다. 아무 것도 물정모르는 사내는 으스대며 돌아와 큰소리로 오늘도 대단한 사람을 만나 한턱 잘 얻어먹고 왔노라고 아내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현실감이 없는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는가. 이 한심한 남편을 아내는 어떻게 해야할까.
다른 얘기로 넘어가자. 어느날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주나라 문왕의 사냥터는 사방 칠십리가 넘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했소?” 맹자가 답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선왕이 놀라서 물었다. “설마 그렇게 컸을까요?” 맹자가 대답했다. “그래도 당시 백성은 너무 작다고 불평했답니다.” 선왕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과인의 사냥터는 사방 사십리인데도 너무 크다고 불평하니 그 까닭을 모르겠소,” 맹자가 말했다. “문왕의 사냥터는 사방 칠십리지만 백성이 들어가 땔감을 하고 산토끼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문왕이 백성과 함께 사냥터를 쓰니 백성이 너무 작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왕께서는 어떻습니까?”
맹자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처음 제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나라의 금령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왕의 사냥터에서는 백성은 땔감은커녕
풀도 벨 수 없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으며, 사슴을 잡으면 살인죄로 다스린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한다면 나라 안에 사방 사십리나 되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백성이 너무 크다고 하는 것은 실정과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배운다. 사냥터의 크기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냥터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백성에게 부담스럽다면 크다고 느끼는 것이고, 부담스럽지 않다면 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맹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임금이 복지를 백성과 함께 누리라는 것, 바로 여민동락(與民同樂) 사상이다. 왕조사회에서조차 그러했으니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나라의 통치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마땅히 국민과 함께 아파해야 하고 국민과 똑같이 고통을 나눠가져야 한다. 허나 현실은 너무나 먼 곳의 딴 세상과 같이 굴러가고 있다.
맹자의 가르침은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의 통치자는 어떤가. 도무지 어느 나라 통치자인가 싶을 정도의 현실감각을 보여준다, 거기에다 국민들이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팍팍한 삶을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는지 조금도 신경쓰지 않겠다는 ‘나몰라라’식 태도로 일관한다. 한 번도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는 그저 이 나라와는 유리된, 대통령 관저라는 자신만의 영역에 들어앉아서 ‘홀로 아리랑’을 구가중이다.
여러 차례 지진에 국민들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든 말든, 사드배치에 항의하며 식음을 멀리하고 몸져 눕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는 모습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신있고 듬직한(?) 통치자의 실상이다.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고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그 많은 정치인들은(최고통치자는 워낙 독보적인 존재이니만큼 논의에서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문제의식조차 없다.
제나라 선왕은 제사에 쓰일 소가 우는 모습을 보고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했다. 맹자는 이런 선왕의 마음씨를 중요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왕에게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민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미루어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을 품을 수 있으리라고 본 거다.
그래서 왕도를 생각하는 사람은 연민의 마음씨를 지녀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은 전혀 딴판이다. 자기 집 강아지에게도 수십‧수백만원이 나가는 집을 사주는 세상인데 길거리를 떠도는 노숙자나 행려자들은 모르는 체하는 게 세상이다.
우화라면 장자(莊子)를 능가할 사람이 없고 비유라면 맹자(孟子)를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하지만 장자와 맹자에게서라도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우리의 처지는 딱하기 짝이 없다.
물론 장자와 맹자의 가르침은 높다. 맹자께서 잊어달라고 하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장자께서 잊어달라고 하는 것은 인위(人爲)이다. 두 스승이 잊으라는 가르침은 서로 다르지만, 삶을 불편하게 하지 말고 편안하게 하라는 내용만큼은 같다.
장자는 성망(誠忘)이란 말을 남겼다.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것을 성망이라고 한다.
성망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일까마는 누구보다 먼저 성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국정 최고책임자다. 한 개인의 성망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의 성망은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 개인의 잘못이나 비극에 머물지 않고 온 국민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최고의 권력자에게 참모나 비서를 수십명씩 붙여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자기 위치를 못 찾고 헤맨다면 그 폐해와 손실은 누가 보상해주겠는가. 때문에 지도자를 뽑을 때 국민들의 감식안이 밝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못했을 때 불이익은 고스란히 국민들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맹자가 제 선왕에게 말했다. “임금님의 신하 한 사람이 친구에게 처자식을 맡기고 초나라에 갔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보니 그의 처자식은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돼 있었습니다. 이런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왕이 말했다. “절교해야지요.”
“만약 형벌을 관리하는 관리가 직책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면직시켜야지요.”
“그럼 한 나라의 정치가 매우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왕은 고개를 돌리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딴소리를 했다. 논리상으로는 왕도 바꿔야 한다는 답이 나와야 하는 대목이다. 그러니 왕이 딴청을 피울 수밖에.
이런 맹자속의 사례가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우리 현실과 그리도 딱 들어맞는가. 장관이 잘못하면 해임건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국회의 해임건의에 ‘나는 모른다’하는 대통령의 자세는 꼭 선왕의 딴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래 앉으면 새도 살을 맞는다고 했다. 이로운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마침내 화를 당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자리가 영원불후의 권좌가 아님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생각있는 자의 자세다.
추월한강(秋月寒江)이라 했던가. 유력한 사람의 ‘맑은 마음’은 정녕 이 세상에서 접해보기 어렵게 돼간다.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마음을 바라는 것부터가 무리일지 모르겠다. 아예 걸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 만드는 것이겠기에 말이다.
“온 백성이 병들고 아프니 나도 병들고 아프다.” 유마힐(維摩詰)의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저릿저릿한 울림이 있다, 평범한 소시민의 가슴에도 와 닿는 이 말이 어찌 그 의기양양한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안 들릴까. 도무지 모를 일이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