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기억의 저 편’


길거리에 달력을 든 사람이 자주 눈에 띕니다. 날씨가 춥고 어설퍼도, ‘그럴 때가 됐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해를 마무리할 준비가 아직 덜 됐는데, ‘벌써 연말인가싶어, 마음이 뜨끔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제 만족스럽게 보냈던 세월이 있었던가 싶으면서도 아쉬움이 큽니다. 지난 일 년을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저 편’, 더 먼 옛날 일까지, 하나 둘 씩 되새겨집니다. 반짝 빛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후회가 되는 일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문득 가슴이 아픕니다. 조금씩 해가 일찍 저물고, 날은 더디게 밝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입니다. 봄은 그 훨씬 뒤에 옵니다. 유달리 추위를 타는 칸나와 파초는 화분에 옮겨서 안으로 들였습니다. 타는 듯 붉은 칸나꽃과 차양을 두른 것 같은 파초 잎의 그늘을 즐기려면 그 정도 배려는 필요합니다. 후회는 하더라도, 다독거릴 일들은 따로 챙겨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만물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스스로 묻고, 자신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동물들이 정글에서 사는 방법과는 다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도 간혹 생존경쟁이라고 부릅니다만, 그것이 어찌 짐승들이 밀림 속에서 사는 방법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시를 쓰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영물,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진화될지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들 인간처럼, ‘은유(metaphor)’를 쓰고 이해하기까지는 이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들 스스로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일 것입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들리는 얘기들 가운데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참으로 절망스러운 때가 많습니다. 어쩌다, 인간의 겉껍질인, 품위라도 지키자고 얘기하게 됐는지 안타깝습니다.

 

기억의 저 편에 있는 사실들이 변할 까닭이 없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기억입니다. 우리들의 두뇌는 기억을 상당한 정도로, ‘포샾’, 각색을 합니다. 싫은 것은 잊고, 잘못 된 것은 스토리를 바꾸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이 점진적으로 기억을 왜곡한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 왜곡이 더 심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멀고 가까운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전 세계적, 전 인류적, 집단적인 오류가 드물지 않게 나타납니다. 우리 인류는 갑자기 발생한 전염병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위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인류는 1차 세계대전(1914 – 1918)을 겪고 나서, 불과 21년 만에, 2차 세계대전(1939 – 1945)을 치렀습니다. 그 당시에도, 현대 문명을 눈뜨게 만들었던,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었지만,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 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한반도에 죽음의 백조가 떴다.’ 끔찍한 기사였습니다. 한반도 상공에 죽음의 백조가 떴으니, ‘든든하다는 것인지, ‘큰일 났다.’는 얘기인지, 멍멍했습니다. ‘시어머니도 밉지만,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전쟁이 났을 때를 대비해서 자국민들 구출작전을 위한 훈련을 했습니다. 일본자위대가 한반도에 투입되는 상황을 연출한 것입니다. 누구는 북한의 핵을 대비하려면 미국일본한국군사적 동맹을 맺어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아베 총리 면전에서, ‘한국과 일본의 군사 동맹은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대통령도 한일 군사동맹을 맺는 것을 우리나라의 국민들 절대 다수가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둥이가 겸상하자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둥병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 쓰던, 끔찍이 싫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솔로몬 왕의 재판 얘기가 있습니다. 왕이 지혜로 어떻게 아기의 친어머니를 가려냈는가라는 내용입니다. 재판은 누가 진정으로 아기를 사랑하는가.’라는 점에서 결판이 났습니다. 물론, 우화요, 문학적인 표현이겠지만, 가짜 어머니는 아기를 둘로 나눠도 좋다고 했답니다. 그런 솔로몬의 재판 얘기는 오늘날 서울에서도 유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들 애국자라 하니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지 가려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촛불을 든 사람도 있고,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 대부는 몇 번을 봐도 기막히게 좋습니다. 명장면이 많지만, 대부(말론 부란도)가 죽기 직전에 아들(알 파치노)에게 누가 변절자였는지 찾아내는 방법을 알려 주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추리소설은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에 묘미가 있습니다. 대개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범인이기 쉬운데, 애국자 감별도 그런 식으로 될까요?

 

이명박 대통령은 흥정을 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투정을 한다.’는 글을 봤습니다. 한참을 읽고 무슨 뜻인지 짐작을 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추리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도 있는데, 역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내용입니다. 범인이 몇이나 될까요? 열차에 탔던 사람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을까요? 지난 해 겨울부터 지난 봄,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때까지, 또 새로운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장관들을 임명하고, 지난 정권의 적폐를 들추고 있는 지금의 상황까지, 우리나라는 가히 혁명적인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어쩌면 숲속에서 자기 패거리들을 불러 모으려는 갖가지 괴성도 들리는 듯 하고, 같은 패거리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쥐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는 무리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끝까지 노리는 것은 기억의 변형입니다.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저질렀던 비리들을 기억의 저 편에 두고 포샾을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 가을에도 목서가 향기로웠습니다. ‘구골 목서가 차례대로 피면서 맑은 향기를 내 뿜었습니다. 늦가을 가장 늦게, 어떤 때는 눈을 맞으며, 피는 구골 목서는 향기가 일품입니다. 겨울에는 또 어떤 꽃이 향기를 뿜을까요. ‘계화라는 상록수가 있습니다. 화분에 옮겨 거실의 창변에 두면 겨울 내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습니다. 사람도 모름지기, 계화처럼, ‘기억의 저 편에 있는 것들을 그렇게 맑고도 향기롭게 뿜어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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