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Eutopia)’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역 유토피아’라고도 부른답니다. 인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서양에서 플라톤(BC427 – BC347)은 ‘이상국가’을 생각했었고, 토머스 모어(1478 – 1535)는 기행문형식으로 쓴 소설에서 ‘유토피아’를 상상했습니다. 동양에서도 고대부터 수많은 이상향에 대한 전설과 설화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토피아’ 즉 ‘이상향’은 ‘어느 곳엔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정치체제는 비록 대부분 명목상이었기는 하지만 ‘이상향’을 건설하자는 인류의 오랜 염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디스토피아’는 그런 열망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인류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도입된 개념으로 보입니다.
‘디스토피아’라는 용어는 영국이 아일랜드를 핍박할 때 영국의회에서, ‘자유론’으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1806 – 1873)이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상향’과 상대적인 것으로 고안 된 개념에는 ‘디스토피아’와 함께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가 있습니다. ‘아포칼립스’는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을 뜻한 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요한계시록 이후’가 되는 셈입니다. ‘이상향’이란 어떤 세상일까. ‘역 이상향’이란 또 어떤 세상일까. 지금까지 수많은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이 그런 서로 각각 상반된 모습들을 상상하며 세세하게 작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다만, ‘디스토피아’는 ‘사회체제가 과학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개인을 어떻게 핍박하느냐’가 관심사라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세계가 핵전쟁 등으로 최후를 맞게 된 이후에 어떻게 비참한 상황이 될 것인가’라는 것을 묘사한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하는 ‘3대 문학작품’이 있습니다. 조지 오웰(1903 – 1950)의 ‘1984년(1949년 출간)’과 올더스 헉슬리(1894 – 1963)의 ‘멋진 신세계(1832년 출간)’, 그리고 예브게니 자먀찐(1884 – 1937)의 ‘우리들(1921년 출간)’입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 1945년 출간)’도 짧지만 대단한 작품입니다. 당구장에 가면,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돼지들이 당구를 치고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라는 돼지가 순진한 돼지들을 선동하여 어떻게 독재자가 되는지 그렸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독재자 나폴레옹은 원수라던 이웃 농장주 인간들을 초청하여, 다른 동물들이 창틈으로 훔쳐보는 가운데, 만찬을 갖습니다. 인간과 돼지들은 속임수를 쓰며 카드놀이를 하다가, 양쪽이 동시에 카드의 ‘스페이드에이스’를 내며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당구장 그림은 바로 그 만찬 장면이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조지 오웰의 소설에 대해서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했습니다. 소설 ‘1984년’이란 제목은 소설을 썼던 1948년의 마지막 숫자 48을 84로 바꾼 것이 랍니다. 1945년 출간 된 영문판 ‘animal farm’은 외국어 번역으로는 세계 최초로 1948년 우리말로 번역 되었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동물농장’의 내용을 반공소설로 알고, 미국의 CIA가 작고한 조지 오웰의 미망인으로부터 판권을 샀답니다. 할리우드에서 소설의 내용을 마음대로 고쳐서 반공영화를 만들고, 그 당시 냉전체제의 최전방이 한반도였기 때문에 미국 군정청의 공보처 관료였던 ‘김길준’을 시켜서 번역하여 출간했답니다. 내용 가운데 몇 부분은 원본과는 다르게 바꿨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조지 오웰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파시스트들과 스탈린을 혐오해서 ‘동물농장’을 썼을 뿐이고, 따라서 ‘반공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랍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도 우리들에게는 섬뜩하게 느껴졌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있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지나, 1984년 당시는 전두환의 군사독재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당시에 ‘헬기로 사격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놓고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재판이 열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오늘도 전두환은 헬기의 사격이 없었다고 우겼고, 이에 반하여 광주지법은 유죄로 인정,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를 선고했다 합니다. 소설 ‘1984년’을 보면, “반체제인사가 쓴 책도, 반정부 단체라는 지하조직도, 은신처를 제공한사람도 모두 정부가 파 놓은 함정들이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래의 그 어느 곳이 되었든,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어렵게 쌓은 유토피아일지라도 교활한 몇 사람들의 농간만으로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저절로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라는 괴질이 창궐하고 있고, 끝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를 보면서 디스토피아가 어떤 세상인지, 인류가 염려했던 그런 세상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는 것인지, 우리가 믿을 수 있을 것은 과연 무엇인지 둘러보게 됩니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다툼은 어떻게 끝날 것 같습니까. 세상엔 별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에 대해서 요즘 상황이 오죽 답답했으면 “공직자는 집단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받들어야 한다.”고 했겠습니까. 그 말이 어떻다고 누구는 “드디어 대통령의 민낯이 드러났다”라고 합니까. 어디서 잘못되어 구려서 하는 말입니까. 추운 시절을 지나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른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그 추운 계절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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