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깨끗한 종이 한 장을 받아든 것과 같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어떤 좋은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 금년 우리 집 안 밖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등등, 365일 동안을 어떻게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 짐작해 보게 됩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를 보면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새벽녘 두어 시쯤 되겠지요, 찬 기운에 잠에서 깨어, 집 안 밖의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베개를 고쳐 고이며 잠자리에서 뒤척이시던, 옛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1960년대와 그 이전 1950년대 후반까지의 시절이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이 납니다. 등잔불빛에 그 지역 국회의원이 배포한 한 장짜리 달력이 선명했습니다.
지금은 ‘가훈’이라는 것을 들먹이는 사람조차 별로 없게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훈 만들기’와 ‘가훈 써주기’ 등등의 행사가 활발하게 이뤄진 적이 있었습니다. 서예가들은, 요즘 용어로 ‘재능 기부’라고 하지요, 무료로 곳곳에서, 가훈을 써주기도 하고, 가훈이 없는 경우에는, 작명해주듯이, 만들어 주기까지 했었습니다. 그 때 그 가훈들 가운데에서 제일 많은 것은 단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었습니다. 굳이 설명을 안 듣고도 알 수 있는 말이지만, 글씨를 써주는 사람은 으레 또박또박 문자 풀이도 해 주곤 합니다. “옛날에 나온 명심보감에 있는 말인데,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를 이룰 수 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식이었습니다. 대장부에게 큰 뜻이 있다면 마땅히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진대, 수신(修身)을 한다고 치면, 제가(齊家)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으로 될 성 싶었던 것이지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말이 쉽지, 어디 그것이 말과 같이 쉬운 일입니까? 저 자신을 포함해서, 제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만큼 오붓하고 아기자기하게 지내는 집이 그다지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집집마다 다 다르겠지만, 불만의 발단은 역시 경제적인 것이 앞서지 않나 싶습니다. ‘화(和)’의 어원은, 생황 비슷한 옛 악기가 있었는데, 두 음이 썩 잘 어울린다는 뜻이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어떤 사람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가족의 구성원이, ‘내가 아는 누구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 모양이냐.’라고 푸념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명색이 가장이랍시고, 장터에서 약주도 몇 잔 걸치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좋은 뜻이라며 ‘家和萬事成’이라 써 붙여 놓은들, 가장의 뜻대로, ‘가훈(家訓)’이 되어, 드디어 ‘가화(家和)’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지만, 가족의 구성원끼리도, 인간적인 신뢰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TV에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시리즈를 보면, ‘자연인’이라는 주인공이, 대부분 어느 시점에 가족의 일원으로서 신뢰가 깨졌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했든지, 가족 가운데 누가 몹쓸 병을 얻었다든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든지, 어떻든 혼자 외톨이가 되어 지내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산속 같은 곳에서 본인들이야 그런대로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고 할지 몰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라는 관계를 제외하고라도, 모두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고, 형제들이고 자매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들 아닙니까. 지금보다 생활이 훨씬 더 궁핍하고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가족이라면 서로 헤아려서, 대화를 나누고, 꼭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세모에 연세가 꽤 많으신, 금년 구순이 되시는, 교수님께 인사를 다녀왔습니다. 말씀을 한참 나누시다가, 할아버님이시라며, 오래 된 사진 액자를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께서 나를 아버지로부터 뺏어서 전적으로 혼자 가르치셨어.”라고 하셨습니다. “예? 아! 그러셨군요. 지금 같아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일 텐데요. 요즘 어떤 젊은 아빠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자식 교육을 맡기겠어요? 그 때 교수님은 엄격하게 제대로 잘 배우셨겠네요?” 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그 당시 무엇을 배우셨을까, 궁금했습니다. 대개 천자문을 배운 다음,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배웠을 텐데, 요즈음 꼭 그렇게는 아니더라도, 그런 내용들을 약간씩 바꿔서 가르쳐도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초 중등 학교 교과과정 가운데 어느 단계에서도 포괄적으로 동양적인 인간관계를 배울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각국에서 백신을 계발하고,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에서, 벌써 백신 접종이 시작 되는 등, 새해 들어서 새롭게 전개되는 코로나19의 사태를 보면서, ‘세계는 한 지붕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국가까지 확대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세계가 한 국가요,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한 커다란 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입니다. 우리나라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언제쯤이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를 이룰 수 있을 까요. 명심보감에 “삶을 지키려면 욕심을 줄이고, 몸을 지키려면 이름나는 것을 줄여야 한다. 욕심 없애기는 쉬우나, 이름나는 것을 줄이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선거 결과를 놓고 막판까지 생떼를 쓰는 트럼프나, 대통령이 재가까지 한 징계를 재판으로 끌고 간 검찰총장이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해주는 듯 씁쓸합니다.
을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