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이 살다가 보면 잘못이 없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의 감각기관이라는 것들이, 소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리 정확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부터 전해지는 부정확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느끼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어찌 꼭 ‘모두 옳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슬퍼서 크게 호곡할 때도 함께 슬퍼하지 않던 때가 얼마나 많았고, 또 누가 즐거워서 노래하거나 춤을 출 때도 함께 기뻐하지 않았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웃과 희로애락을 함께하지 못했던 후회스러운 일이 참으로 많지 않았습니까? 한편 그렇게 부정확하게 느끼는 ‘희로애락’이라는 감정 자체도 언젠가 소멸해버리는 생명체들이 갖는 축복이요 비극이며 또한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빈부의 격차가 걱정입니다. 근래 터무니없이 치솟은 수도권의 아파트값이 집이 없거나 수도권 밖에 사는 많은 사람에게 박탈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일부 정치가들은, 자기 자신들 책임은 쏙 뺀 채, 그런 박탈감을 정부에 대한 분노로 전환 시키려고 안달입니다. 우리는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르네 그루쎄(Rene Grousset, 1885-1952)가 쓴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라는 책을 읽어봤습니다.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2천여 년 동안 벌어진 피비린내가 점철된 역사 얘기였습니다. 그 내용을 짧게 줄이면, “광대한 초원에는 몇십 년마다 주기적으로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유몽민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문명 세계를 약탈하고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명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야만적으로 파괴될 수도 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재난지원금을 놓고 논란이 많습니다. 전 국민에게 주느냐 아니면 어느 일정한 소득 수준까지 주느냐로 서로 엇갈립니다. 문제는 어느 일정한 소득 수준까지 대상자로 선정하는데 행정적인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고 합니다. ‘재난지원금을 일부에게만 지원하자.’라는 주장은 ‘부자에게 왜 주느냐?’라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원금을 일부만 선별하여 지원하기 위하여 인적–물적으로 자원이 꽤 많이 소모된다고 해도 ‘부자에게는 재난지원금을 주지 말자.’라는 거 아닙니까? 저의 느낌이지만, 그것 역시 정치가들이 많은 국민의 박탈감을 분노로 전환 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 사람을 미워한다.’라는 구도는 얼마나 끔찍한 것입니까. 저의 생각은, 재난지원금은 모두에게 나눠주고, 재벌을 비롯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재난기금을 조성하여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노태우–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도 우리 사회에서 여러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사과답지 않은 사과라도 했던 노태우’는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사과답지도 않은 사과조차도 거부했던 전두환’은 가족장을 치렀습니다. 어느 언론에서는, ‘518 광주 민간인학살’의 가해자 전두환이 피해자들에게 끝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사망하자 ‘가해자가 잘못을 빌고, 피해자가 그것을 용서할 기회조차 잃었다.’라며 한탄했습니다. 노태우 씨도 그렇지만, 전두환 씨는 참으로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웠습니다. 그런 두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지켜보며, 그들 당사자는 물론 말할 것 없고, 조문하러 모인 몇몇 인물들이 보인 언행은 해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노태우 씨 밑에서 총리를 지냈던 어떤 인물은 ‘당시 육사 출신들은 엘리트였고,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상황이었다.’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 해를 보내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해 봅니다. 즐거웠던 일은 무엇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도 그저 가물가물할 뿐입니다. 사람이 제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 같습니다. 분명하게 능력이 안 되는데, 무엇을 하겠다고, 구렁이가 저 잘났다고 몸을 추세우듯 하는 꼴이 가관으로 보입니다. 엊그제 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앞두고 남의 연주는 잘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연주를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흉내 낼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우리나라의 다음 대통령이 되든 그렇게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독이 든 성배’를 마시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 갖춰야 하는 소명 의식과 감당해야 할 업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해야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을하
<시사전북 12월호 게재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