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같은 ‘진짜’를 찾습니다.

진짜 같은 가짜들 세상이 되었습니다. 서로 가짜라고 손가락질하니 어느 쪽이 가짜이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진짜 가운데 가짜를 찾기보다, 가짜 가운데 진짜를 찾기가 더 어렵게 됐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재앙이고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우리가 가짜에 속아 넘어가서 부화뇌동했었지 않습니까? 그랬으면서, 잘못됐다고, 나도 사실 억울하다고, 반성하지도 사과를 한 적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메주를 모르는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어느 코가 큰 외국 장성이, ‘들쥐와 같다.’라고, 조롱했었듯이, 우리가 남의 말만 듣고 쉽게 휩쓸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줏대 없이 가짜에 넘어간 것,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속은 것도 억울하지만, 주위에 떠벌리기까지 했었지 않았습니까?

우리 교육에 문제가 많습니다. 학교 교육도, 가정교육도, 사회 풍조도 무언가 어긋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크게 ‘교과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각급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과정은 교육의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과과정 말고, 그 학교의 전통이랄지, 그 밖의 수많은 사회적 요인들이 교육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작금, ‘학교 폭력’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들 사이에 갈등이랄까, 긴장 관계이랄까, 여간해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학교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적 옛날에는 ‘학교의 주인은 교장’인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개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문에 어떻게 현답이 있겠습니까. 학교의 주인이 누군가를 따지는 일은 교육에 대한 철학이 지극히 빈곤한 사람의 짓으로 보입니다. 학교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기관 아닙니까. 굳이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 묻는 것은 이상스럽습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수요자 중심 교육을 해라.’ ‘학생을 존중해라.’라는 소리가 교육 현장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어느 적 옛날에 분명 학생들이 존중되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입니다. 각급 학교별로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교과별 교육과정이 있습니다. 교사는 개인차가 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완전 학습’에 가깝도록 가르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선생이 존중받지 못하면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각급 학교는 교사를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보다 가정교육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중학교 과정까지, 학교에서는 각 교과과정을 통하여 전인교육을 지향하고 있는데, 학부모들이 원하고 있는 생각은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특히 예체능 과목들에 대한 학부모들의 견해가 예전보다 꽤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과정까지만이라도 예체능 과목을 충실하게 받았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언젠가 중학교 음악 자습서와 미술 자습서를 봤었습니다. 제가 ‘왜, 그런 내용을 열심히 배우지 못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매우 컸습니다. 교양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많은 내용이 거기 있었습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꽤 이름 있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 어쩌면 그렇게 품위가 없고 교양이 부족한지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벼슬이 높을수록 더 개똥철학에 가까운 허접한 헛소리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늘어놓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속담에 ‘일견(一犬)이 폐형(吠形)하니 백견(百犬)이 폐성(吠聲)이라’라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검색 해봤더니, ‘개 한 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모든 개가 그 소리에 따라 짖더라.’라는 뜻이고, ‘근거 없는 소문에 대해 사람들이 사실인 양 따라서 떠들어대는 것을 비유.’했답니다. 중국 얘기겠지만, 옛날에도 가짜 뉴스는 많이 유통됐던 모양입니다. 이 속담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어쩌면 요즘 세태와 닮았고 그것을 희화적으로 꼬집었는지 씁쓸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고 하지만, 생소한 장마와 찌는 무더위 속에 다시 어떤 태풍이 올라올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 낯설기만 합니다. 이때를 맞춰서 신임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열린답니다. 학교 폭력과 학부모 갑질 얘기도 나올 텐데, 웬만한 강심장으로, ‘가짜 속의 진짜’와 ‘진짜 속의 가짜“ 얘기를 어떻게 지켜볼지, 지레 겁부터 납니다.

우리는, 저를 포함해서, 뉴스를 너무 자주 많이 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시콜콜, 허접한 내용까지, 그것도 큰 화면으로 생생하게, 듣고 보노라면, 채널을 자꾸 바꾸게 됩니다. 채널이 몇백 개인데도, 재방송들이 많고, 모두 거기서 거기들 뿐으로, 볼만한 프로는 별로 없습니다. 왜 저렇게 많은 방송 채널들이 제 역할을 포기하고 허접한 화면으로 채우는지 참 아쉽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나라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가, 노엽기고, 그렇게 방송에 대한 사명감이 부족한 사람이 있는가 싶습니다. 그런 방송인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 천장에 철근을 시늉으로 넣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가짜들이 아닙니까? 곧 내년이면 선거가 있답니다. 어떻게든지 가짜는 걸러내야 합니다. ‘가짜 같은 가짜’는 물론, ‘진짜 같은 가짜’도 기억해 둬야 합니다. ‘가짜라고 핍박받는 진짜’가 있습니까? 기필코 찾아서, 그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도록 합시다.

을하

#시사전북 2023년 8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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