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고향-망향-그리워’, 어떻게 다릅니까

한 해의 끝자락에 서니 고향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정지용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우리 가곡 ‘고향’이 떠올랐습니다.

사진: 고향 악보

누가 이 노래의 시가 좋은지, 곡이 좋은지를 묻는다면 대답이 난감할 것 같습니다. 시도 좋고 곡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곡에 시가 세 가지 있다면 곡이 조금이라도 낫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채동선(1901-1953)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채중현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 채중현은 전라도 갑부였다고 합니다.  채동선은 8세 때 벌교에서 수십리나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의 등에 업혀서 다녔다고 합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5세 때였습니다. 재학 중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홍난파에게 직접 바이올린 렛슨을 받았다고 합니다. 3.1독립운동에 연루되어 경기고보는 4학년때 다닐수 없게 됩니다. 학교를 그만두었는데도 왜경의 감시가 심했습니다. 이에 부친은 채동선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채동선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독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925년부터 5년 동안 베를린의 슈테른쉔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1929년에 귀국하여 바이올린독주회를 열었습니다. 홍난파는 수 차례에 걸쳐 도하 각 신문에 환영기사를 썼습니다. 둘 사이는 사제지간 아닙니까.

1930년 손아래 누이인 채선엽(전 이화여대 교수)이 진천 출신 이화여전 친구 이소란을 소개했습니다. 그 해, 둘은 진천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가 독일에서 가져온 바이올린이 꽤 유명한 명기라고 합니다. 당시 계정식을 비롯한 바이올리스트들이 독주회를 할 때면 채동선의 악기를 빌려서 썼다고 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채동선의 아들이 가져갔는데, 손자가 그 ‘명기’로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전합니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를 9곡 가곡으로 작곡했습니다. 채동선이 독일에서 귀국한 것이 1929년이고, 정지용이 시 ‘고향’을 발표한 것이 1932년입니다. 1945년 해방이후 거의 모든 음악 교과서에 ‘고향’이 실렸답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출판된 명곡집 가운데도 예외없이 ‘고향’이 실렸다고 합니다. 6.25전쟁 직후에 월북문인 예술가들의 작품사용금지가 내려졌고 정지용 시는 더 이상 출판물에 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각 음악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들은 당황했습니다. 우선 급한 대로 <고향>은 박화목 시인에게 부탁하여 <망향>이라는 시를 지어, 일종의 ‘더빙’을 했습니다.  그 뒤, 1970년대에, 이소란 여사를 비롯하여 음악인들이 정지용시에 작곡된 곡들 모두를 다른 시로 대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곡이라도 알리자는 취지였겠지요. 그때 또 만들어진 시가 이은상의 ‘그리워’입니다.

채동선이 작곡한 정지용 작시 ‘고향’은 6.25 전 세대 사람들은 <고향>으로, 1960년대- 1970년대 사람은 <망향>, 다시 1980년대 이후의 사람들은 <그리워>로 이 곡을 기억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아직 <고향>이라는 가곡을 제대로 녹음한 성악가가 없다는 점입니다. <망향>은 단연 ‘박노경’이 좋았습니다. <그리워>도 몇몇 여류성악가들의 녹음이 좋습니다. 문제는 <고향>입니다. 남자가 불러야 되는데, 아직 마땅히 좋은 녹음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자장가를 작곡했습니다. 우리나라 남자 성악가는 모두  <고향>을 녹음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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