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느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누군가 딱 짚어서, 대신해서, 표현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어찌 시뿐이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그런 목표와 역할을 지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래전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하시며, 즐거움이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는 각박한 세태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이 더 잘 표현하여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손이 닿지 않는 등짝이 가려울 때 누가 긁어주면 고맙듯이 그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몇백 년 또는 수 천 년 전의 예술작품에서도 격한 찬탄과 깊은 위로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히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어쩌다 이상(李箱 1910-1937/ 본명: 金海卿)의 ‘오감도(烏瞰圖)’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왜 하필 그 어렵고 해괴까지 하다는 ‘오감도’라는 시가 떠올랐을까, 아마 작금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듯 급박하게 돌아가는 불안한 상황 때문 같습니다. 이상의 ‘오감도’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모두 15편의 시가 실린, 시집 이름이랍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15회 걸쳐서 연재됐답니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 당시 사장이었는데 소문 난 고집불통이랍니다. 시가 얼마나 어렵고 해괴하게 보였는지, 그런 고집불통도, 빗발치는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15회까지 연재하고 도중에 중단했다고 합니다. 학예부장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1978) 이었는데, 이상에게 상허가 시를 써보도록 권유했었던 것이라 합니다. 16회째 ‘작가의 말’은 신문에 싣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시 얘기’는 잠깐 뒤로 미루고, 이상 주변의 친구들 얘기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는 등, 이상의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한국의 ‘로 트랙’으로 알려진, 꼽추 화가인 친구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이 중매를 섰답니다. 구본웅의 아버지 구자혁(具滋赫)은 창문사(彰文社)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는데, 창문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을 인쇄했던 큰 출판사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가 사장을 맡았답니다. 화가 구본웅의 친모가 죽은 뒤, 부친 구자혁은 변동숙을 맞아들였는데, 화가 구본웅은 계모인 변동숙의 이복 동생 변동림(1916-2004)을 이상에게 소개했고, 둘은 1937년 결혼했답니다. 이상-변동림 커플은 4개월쯤 살다가 이상이 죽었고, 변동림은 1944년에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결혼하여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는데, 향안(鄕岸)은 김환기가 쓰던 옛날 아호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오감도 15편 모두 원문에는 오늘날과 같은 맞춤법은 물론 없고, 문장을 모두 붙여서 썼습니다. 시의 제목도 따로 없고, 맨 처음의 시는 ‘시제1호’로 시작해서, 마지막의 시는 ‘시제15호’로 끝납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시제1호’만을, 맞춤법을 살려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가 난해하여 참고가 필요하다면 ‘성한용 칼럼’을 참고하십시오.)
시 제1호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3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4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5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6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7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8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9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0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1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2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3인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낫았소)
을하
#시사전북 2023년 9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