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그 언제, 이맘때쯤이던가, 정읍 칠보 무성서원에 갔었습니다. 칠보에는 일곱 가지 보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향약(古縣鄕約)’, 임진왜란 때 왕조실록을 보존했다는 ‘분충거의(奮忠擧義)’, 고운 최치원 선생을 모신 ‘무성서원(武城書院)’, 도강김씨 집안의 ‘공신록권(功臣錄券)’, 정극인의 ‘상춘가곡(賞春歌曲)’, 단종 왕비 정순왕후 출생지라는 ‘왕비유지(王妃遺址)’, 유역변경식 칠보 수력발전소의 물이 내려오는 ‘화경폭포(火鏡瀑布)’,등을 꼽았습니다. 정읍시에서는 신라 시대 이곳 태산군의 태수였다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이라는 상춘곡을 쓴 정극인을 기려서 ‘선비문화관’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선비문화관 앞 방죽에 백련(白蓮)이 뒤늦게 피어있었는데, 쌀쌀한 가을 날씨 속에 향기가 맑고 향기로웠습니다. 그 뒤에는 어떤 연꽃에서도 그처럼 맑고 짙은 향기는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꽃향기는, 꽃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아침과 저녁에 짙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꽃가루받이하는 곤충들을 끌어모으려는 때가 향기가 제일 짙기 마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맑은 향기는 주로 흰 꽃에서 나는 듯합니다. 이른 봄, 하얀 미선나무꽃의 향기가 그렇고, 서향도 흰 꽃이 보랏빛 꽃보다도 훨씬 향기가 맑고 짙습니다. 붉은 모란은 향기가 거의 없지만, 흰색은 기막히게 향기가 맑고 좋습니다. 여름에 피는 꽃은 비교적 색깔이 화려합니다. 올해 저의 집은 여름 내내 채송화가 꽃 잔치를 벌였습니다. 봄에 화원에서 채송화를 색색으로 사서, 꺾꽂이를 수도 없이 많이 해놨는데, 모두 다 뿌리를 내려 활짝 꽃들이 만발했던 것입니다. 이제 가을이면 곧 노랗게 금목서가 피고, 뒤이어서 은목서가 하얗게 피고, 마지막으로 늦가을에 향기가 제일 맑고 짙은 하얀 구골목서 꽃이 핍니다.
하얀 구골목서꽃의 향기가 제일 맑고 좋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제 생각뿐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생각이 각각 다른 수많은 사람이 있고, 또 모양과 향기가 다른 수많은 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벼 모가지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 저의 집사람이 벼도 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벼 모가지가 올라오는 벼 논 곁을 지나다가 벼꽃을 보여줬습니다. 벼꽃은 참 볼품이 없습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는 사람 됨됨이를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잘 생기고, 말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쓰고, 사리 판단도 분명한 사람.’을 꼽았다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무로 집을 짓다 보면, 곧은 나무가 좋지만, 굽은 나무도 유용하게 쓸모가 있답니다. 부엌 문턱은 그런 굽은 나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사람도 이 넓은 세상에 주어진 몫이 있고 알아줄 사람도 어디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 무더운 여름부터 비교적 선선한 새벽에 전주 아중저수지 둘레길을 거의 매일 운동 삼아 걷고 있습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저수지 상류 동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곳에 넓은 마루도 설치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빙빙 돌면서 산책을 합니다. 각종 운동기구를 설치한 곳이 있어서, 어느 때는 한참 순서를 기다린 후에, 여러 사람이 운동기구를 이용합니다.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이 거의 반반씩인데, 반려견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 반려견의 뒤처리가 안 돼 며칠째 그대로 방치되어 있기도 합니다. 요즘은 그 전날 밤에 놓고 간 것으로 짐작이 되는, 일회용 종이컵이 곳곳에 버려져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하고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젊은 사람일까, 나이 든 사람일까.” 어느 경우라도, “심신이 얼마나 황폐해졌으면 그랬을까.”하고 마음 아팠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섭고 두렵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그렇고, ‘이스라엘-가자/레바논 전쟁’도 걷잡을 수가 없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고, 싸움을 말릴 사람도 없는 상황 아닙니까. 가장 힘이 센 미국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줘야 할 텐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쟁 당사자 어느 쪽에도, 말이 먹히지 않는 상태” 아닙니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 쪽을 지원하고, 북한은 러시아 편에서 군사적 교류를 강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거기에 남-북이 극단적으로 맞붙어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긴장 상태에서 우발적인 사고가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란을 포함, 전면 전쟁을 원하는 것 같다.”랍니다. 정말로 무섭지 않습니까?
인간의 아집과 탐욕이 불러온 혼돈이요, 자업자득입니다. 인류가 그렇게 많은 전쟁과 시련을 겪고도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해야만 깨닫게 될지 안타깝습니다.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연 이천 명씩 증원으로 비롯된 ‘의료-정부 갈등’의 끝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급병원 4인실 이하 입원료가 50% 인상된다.’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작금 정부와 국회의 관계는 파국적이지 않습니까.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당선된 대통령과 0.7%의 간발의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은 법적으로 같지만, 국민이 보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회는 국민을 대표 합니다.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은 국민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국민에게 신뢰를 잃으면 어떤 영(令)도 서지 않게 됩니다.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아집을 벗어버리고, 맑고 향기롭게 살도록 해봅시다.
을하
#시사전북 2024년 10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