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한 해가 저문다. 굳이 따지자면야 음력으로는 지금이 세모이고 내일이 제석이다. 이런 세밑쯤이면 제 아무리 목석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감회에 젖기 마련이다. 어찌 회한과 미련이 없으랴. 흐르는 세월 앞에서 누구나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날에 대한 보람과 만족도 있겠지만 아쉬움과 미련이 남기 때문이리라. 쏜살같이 지나갔거나 유수처럼 흘러갔거나 마찬가지다. 한 번 보낸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아쉽고 더 심하면 허무하다.
기축년, 우리 생애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작별할 시간이다. 지난 자취를 돌이키며 한 해를 보내는 세밑, 고요히 생각에 젖지 않을 수 없다. 혹은 즐거움과 보람도 얻었겠지만 혹은 아픔과 고통, 아쉬움과 후회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하여 섣달 그믐께면 새삼 가슴이 스산해지며 먼산바라기를 하게 된다.
“이 해도 저물었구나. 북두(北斗)의 자루가 회전하는 것을 여러 번 우러러 보고, 밤은 얼마나 깊었는가, 홀연히 남쪽 성의 딱딱이 소리에 놀랐네. 물고기는 갈기를 떨쳐 얼음 위로 솟구치려 하고 뱀은 이미 깊은 구렁으로 들어가 비늘을 감추었구나. 오직 할 일 이란… 도소주(屠蘇酒)로 진부(陳腐)한 옛 것을 제거하고… 교아(膠牙)엿으로 요사한 기운을 물리쳐볼 뿐이다. 집집마다 수세(守歲)하는 기쁨을 함께 하면서 누구나 흐르는 세월의 감회에 잠기는구나…” <영처문고1(嬰處文稿一)> 서(序)
책벌레로 유명한 청장관 이덕무(李德懋)는 자신의 문집에 ‘영처’를 제목으로 붙여놓았다. ‘영처’는 영아 또는 처자라는 뜻이다.
그가 스무살 때인 1761년 신사년(辛巳年)을 보내면서 감회를 읊은 글이다. ‘수세(守歲)’라고 해서 섣달 그믐날 제야에 집안 구석구석에 등촉을 밝히고 어른 아이, 주인 노복 할 것 없이 모두가 밤을 새우는 풍습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새해를 맞아 반드시 마셨다는 게 도소주다. 그 전통이 어느 사이엔가 잊혀졌다가 최근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다시금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그 틈을 타서 한 주류회사가 도소주를 만들어 시중에 내놓기도 했다. 그 재료와 성분이야 예전 기록에 전해지는 것과 일치하지 않겠으나 이름만으로도 전통냄새가 진하게 난다. 재미있는 것은 도소주를 마시며 진부한 옛 것을 떠나보내고자 했던 마음가짐이다.
도소주는 일종의 약주다. 백출(白朮), 대황(大黃), 길경(桔梗), 천숙(川椒), 호장근(虎杖根) 등을 썰어서 주머니에 넣어 섣달 그믐날 우물 속에 넣어두었다가 정월 초하루 이른 새벽에 꺼내 청주에 넣어서 두어 번 끓여 마신다.
중국 후한의 신통한 의사 화타(華陀)가 만들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당나라 때 손사막(孫思邈)이 만들었다고도 전한다. 괴질과 악귀를 물리친다고 해서 중국에서 설날 아침에는 꼭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져서 식구들이 모두 돌아가며 함께 마신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도소주는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어른들이 나이 순으로 나중에 마신다는 점이다. 즉 집안에서 나이가 가장 많으신 분이 가장 늦게 마시게 된다. 이런 까닭은 젊은이는 한 살을 얻는다는 뜻에서 먼저 마시고, 노인은 생애의 한 살을 잃는다는 뜻에서 나중에 마신다고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야 도소주를 받아 마시면 기쁘겠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기쁘기는커녕 나이를 의식하게 돼 쓸쓸하고 우울해질 것 아닌가. 그 심란한 마음을 술기운으로 누르는 것이니 자연히 많이 먹게 된다. 그래서인가. 조선4대 문장가인 인조 때의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이 도소주를 무려 열 넉 잔을 마시며 시를 남긴다.
도소주 억지로 마시려니 늙은 이 몸 부끄러워 (屠蘇强飮笑衰翁)
열석 잔 마시고서 열 넉 잔째 채우누나 (第十三盃十四中)
콩죽 달게 드시는 어머님 계셔서 다행이요 (幸有母親甘啜菽)
떠돌이 자손 만나는 것도 위로가 되네 (更多兒息慰飄蓬)
박봉(薄俸)에 매여서도 마음은 늘 고향 생각 (心思畎畝躬微祿)
지난 자취 곡절 많았지만 본심은 충직했다오 (迹陷機鋒計本忠)
오로지 문장을 남기려는 뜻 하늘이 아시는지 (一片忱誠千古事)
새벽 등불 꺼지자 동쪽 해 불끈 솟네 (曉燈纔黑日昇東)
어쨌거나 어느 모임에 가서 도소주를 나눌 때에 자신이 늦게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증좌일 터.
모든 음식을 어른부터 대접하는 것에 비춰볼때 도소주는 그와는 달리 역발상인 음식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내내 경로효친사상에 짓눌려 사는 동양인들에게 숨통을 터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잃어버린 우리의 전통 하나를 되살리기 위해서도 이번 설에는 도소주를 구해서 설날 아침에 한번쯤 마셔볼 일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본에서조차 설에는 꼭 도소주를 마신다고 하지 않는가? 꼭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세주를 도소주 삼는 방편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