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 삶의 당도를 높입시다.
복숭아는 맛있는 과일입니다. 제대로만 익으면 복숭아처럼 맛있는 과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맛 본 ‘그 기막힌 맛’ 때문에 복숭아를 사서먹습니다만 좀처럼 기억 속에 있는 ‘그 제대로 된 맛’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품종들이 달라서인지, 수확 철이 우기와 겹치는 탓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는 이웃에도 복숭아 과수원이 있습니다. 계절에 맞추어 과수원을 가꾸시는 주인어른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동네 아주머님들이 과수원 일을 도와주시기도 하는데, 저의 집을 지나가시면서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양반, 무슨 거름 욕심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
“왠 만큼만 하래도, 누구 말을 듣지도 않는 다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만물에 영이 깃들어있지만 사람이 최고로 영묘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볼수록 사람은 참으로 놀랍고 신령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200여만 년에 걸친 기나긴 진화의 결과겠습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사람 말고, 예술을 즐기고 우주를 헤아리는 생명체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현대과학은 거의 우주의 끝을 보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는 137억 광년쯤 됩니다. 소식에 의하면,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허블우주망원경의 성능을 개량했는데, 놀라운 사진들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120억 광년 너머의 ‘아기우주’의 모습을 찍어 보내온 것입니다. 소위 ‘딥필드(Deep field)’라는 방향을 향해서 몇 주간 망원경을 고정하고 노출을 줬더니 광자 몇 개가 잡혔고, 그 것을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초기우주’였다고 합니다.
‘달과 6펜스’라는 서머셋 모옴의 소설이 있습니다. 화가 폴 고갱의 얘기가 바탕입니다. ‘달’은 예술가로서의 이상과 욕망, ‘6펜스’는 사소한 일로 가득한 현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 꿈과 현실이 어디 고갱만의 얘기이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은 있는 것이고, 욕심은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다가보니, 이렇게 됐지만, 아인슈타인, 피카소, 빌 게이츠가 뭐 얼마나 특별하다고 느껴지십니까. 다 제 몫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들 삶의 당도를 더 높여야 합니다. 복숭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황도’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맛을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모든 복숭아는, ‘황도’를 기억하기 위한, ‘대용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 정도 돼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나날이 되어야 합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맑고 향기롭도록, 콩과식물들처럼,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가꿔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비교할 일이 아닙니다. 누가 낫고, 누가 더 못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글씨를 더 잘 쓴다고 떠들 일도 아닙니다. 어떤 풀은 쓰고, 또 어떤 풀은 독이 있어서 약초로 쓰입니다. 어느 풀이 더 좋다고, 나쁘다고 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하는 능력을 친구가 갖고 있으면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일 아닙니까. 우리가 과학자나 예술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유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신령스러운 것 아닙니까.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는 마음이 깊어야 합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학문과 예술을 마음 깊이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기간이 유독 깁니다. 대략, 20년에서 30년 사이쯤으로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왜 이렇게 거꾸로 진화해 왔을까요. ‘교육’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 만큼 오랜 교육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교육은 어떻게 시킵니까.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부터 심어주어야 합니다. 교육에 관한 두 가지 예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근정 조두현(1925-1989)시인은 고향이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이셨습니다. ‘책장을 넘기다가’라는 근정회갑기념 시 선집에 이상비 교수님의 글이 있었습니다. ‘증조부께서 소로 밭을 가르시다가 7서와 소를 맞바꾸셨다’는 것입니다. 7서는 사서삼경을 말합니다. 사서삼경과 소 한 마리를 맞바꿨다는 얘깁니다.
군산대학교 총장을 지내셨던 벽혜 조성환교수님은 고향이 <전북 남원군 대산면>이십니다. 선친께서 남원에서 ‘용일당한의원’을 하셨답니다. 선친께서는 어린 시절에 산 너머로 서당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눈이 내린 날 새벽이면 증조부께서 선친이 다니는 서당까지 가는 눈길을 쓸었다고 합니다.
옛 어른들의 자녀사랑이 어떠하셨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얘기 같습니다. 그런데 자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신 것입니까. 바로 학문이란 그렇게 소중하다는 점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교육이란 배우는 사람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여 나무가 자양분을 빨아들이듯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줄기차게 그 작용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드느냐가 문제입니다. 학문과 예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으면 학습의 동력이 꺼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전체를 두고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국민들의 존중과 사랑이 곧 국가발전의 원동력이고 힘의 척도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걱정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거름만 많이 준다고 복숭아 당도가 높아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육이 투자만 많이 한다고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깊이를 헤아리는 신령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우리 사회를 맑고 향기롭게 가득채울 수는 없겠습니까. 사람이 삶에 대한 사랑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우리 옛 어른들이 소 한 마리와 바꿨던 사서삼경이 헌책방에서는 한 끼 식사값에 불과 합니다. 그런 책을 찾는 사람도 드물고 헌책방마저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복숭아라면 어떤 맛이 나겠습니까. 우리 삶의 당도를 어떻게 더 높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을, 우리 삶의 당도를 팍 높여 봅시다.
장택상/군산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