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얼어붙고 일감도 가뭇없는 이 겨울, 시린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용직 근로자들, 운이 좋다면 따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한 끼를 잇는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오늘 하루도 공치고 배를 곯는다. 사람 사는 세상에 밥 한 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직도 그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껴야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최소한으로서 인간의 길은 과연 그리도 멀고 먼 것인가.
오늘날 도(道)를 생각하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마땅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가 있으니 도덕이요, 법에도 도가 있으니 법도요, 글씨 쓰는 데도 도가 있으니 서도다. 그러나 이 도를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른바 무도(無道)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도란 무엇인가. ‘도(道)’라는 글자의 경우, 그 뿌리를 조사해보면 그 안에 무서운 배경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그 글자에 왜 머리(首)가 들어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단순한 머리가 아니다. 이른바 수급이다. 한자연구가 시라카와 시즈카에 따르면 ‘도’라는 글자는 ‘길을 가다’라는 뜻의 책받침(辶)과 인간의 머리를 뜻하는 ‘수(首)’가 더해진 구조다. 즉 “잘린 목을 들고 길을 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왜 그런 무서운 행위가 ‘도’일까? ‘시라카와에게 배우는 한자는 즐거워’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돼 있다. “다른 씨족이 있는 토지나 외계로 통하는 길은 사악한 영(靈)에 접촉하는 매우 위험한 곳이었는데, 그 ‘도’를 갈 때 다른 종족의 목을 베어 그것을 손에 들어서 그 주술의 힘으로 사악한 영을 쫓아냈다. 그 부정을 씻어내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부정이 씻긴 곳을 ‘도(道)’라고 하고 ‘길’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고대인에게 종교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했는지 문자의 성립을 통해 풀이한 시라카와의 해석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도’의 의미는 여러 모로 새길 필요가 있다. 왜 느닷없이 도를 말하는가. 갈수록 사람의 도리가 무너지는데 도가 무엇인지조차 성찰해보려 하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道可道 非常道), 이름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
도덕경의 첫 부분이다. 도덕경이라고 해서 도덕이나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단지 상편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으로 불릴 따름이다. 이른바 ‘노자’라는 책이다. 현학(玄學: 老莊의 학문)의 첫걸음이 되는 바로 그 고전이다.
여기서 도는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뜻한다. 노자의 도는 당연히 윤리와 강상(綱常)의 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최대한의 법칙성, 다시 말해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법칙을 일컫고 있다.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미하는 참된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됨은 물론이다.
이름(名)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 이름이란 본디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름이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다. 사람들이 개미라고 부를 따름이다.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다만 사람들이 붙인 표지(標識)인 것만은 사실이다.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나 상징인 셈이다.
그런 뜻에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다. 그럼에도 도덕경 제1장은 ‘무와 유는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고 선언한다. 이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릇 차이란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노자는 종국에 “다같이 현(玄)이라고 부르니 현묘(玄妙)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고 1장을 매듭짓는다. 도라는 것은 결국 근원적인 ‘무’이지만 ‘현(玄: 단순한 검은 색이 아니라 무와 유를 합한 검은색)’이 가장 적합한 글자라는 이유에서다. 도라는 설명이 길어졌으나 현묘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세상의 요체인 도가 현묘하니 세상도 현묘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고 만만하게 돌아가는 곳이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모두가 도인이어도 도를 구하기 어려운 판에 가짜 도인이거나 도인 행세하는 사이비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럽다.
세상 질서를 세우는 기준인 법(法)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물이 흘러가는 대로’ 행하는 서로 간의 약속이다. 물이 자연이치에 반하여 거스르거나 우격다짐으로 흐르는 것을 본적 있는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순리를 따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법을 근거로 판단하고 법질서를 수호해야할 위치에 있는 법조 인사들의 몰양심이 도를 넘는다. 자신의 재산이나 가족 등 신상문제에 있어 편법은 당연하고 불법적이다 못해 무도하게 처신한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 양심과 준법을 내세우는 뻔뻔함이 극에 이르렀다.
언어란 묘한 힘을 갖는다. 주술성이라고나 할까. 한 예를 들어보자. 무지개가 어느 언어권에서나 일곱 색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영어는 무지개를 여섯 색으로 나눈다. 물론 더 희한한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의 바싸어는 무지개를 이루는 색을 단 두가지(hul, ziza)로 구분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들 언어권의 사람들은 그들 언어가 정의하는 가짓수만큼의 색으로 무지개를 본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무지개를 그리는 그림이 언어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바싸어를 사용하는 부족이라면 비온 뒤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가 그저 두 줄기로 그려진다는 얘기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들의 모국어가 그어놓은 선에 따라 분할한다. 어떤 사람도 자연을 무색투명하게(객관적으로) 서술하지는 못한다. 자기가 극히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라도 어떤 유형의 해석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 워프라는 학자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주관적인 세계다.
눈을 가리키는 말을 보자. 영어에는 snow와 slush밖에 없다. 이에 반해 에스키모어에는 수십개나 있으며 이 낱말들이 눈의 제각기 다른 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같은 물리적 대상을 놓고도 언어권에 다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내용이다.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즈의 주장이다.
자 그러니 서로 소통하는 데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칠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성향이 크다. 하물며 지극히 정치적이고 치졸하리만큼 계산적인 정치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곧 사기꾼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보다도 어리석은 일이다.
요즘 우리나라 곳곳에서 이런저런 허울 좋은 말들이 횡행한다. 개중에는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말들도 분명 있기는 있다. 하지만 그럴싸하게 분칠되고 번지르르하게 치장된 말들이 너무나 판을 친다. 어차피 현대사회가 자기를 미화하고 과포장하는 속성을 지녔다지만 넘쳐나는 말의 홍수 속에서 이제 어디까지를 믿어줘야 할지 도무지 종잡기 어려운 지경이다.
말은 약속이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서로를 믿어줘야 뜻이 통한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하는 사람은 부풀리고 미화시키고 듣는 사람은 어디까지가 진의인가 속뜻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돌이켜보자. 사탕발림이나 속임수에 흔들림 없으려면 마음의 중심세우기가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이런 저런 삿된 말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그저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라는 시조의 가르침을 새기고자 한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