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평전> 박용래 약전(略傳) 6. 이문구

 

<시인평전>  박용래 약전(略傳) 6. 이문구

 

박용래 시인은 1925년 음력 정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중앙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의 3남 1녀 중 늦동이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원태(朴元泰)씨가 고향인 부여군 부여면 관북리 70번지에서 소지주(小地主)의 넉넉한 살림을 대강 정리하여 강경으로 나온 것은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이었다. 그는 한말의 유생(儒生)으로서 한학과 한시(漢詩)에 일가를 이룬 것으로 원근의 유림(儒林)에서 일러온 터였지만, 평양-대구와 더불어 전선(全鮮)의 3대시장으로 꼽힐 만큼 육운과 수운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로로서 그리고 내포평야(內浦平野)의 농산과 금강으로 올라온 새로운 문물의 교역처로 중부 이남의 상권을 흔들던 강경에 발판을 다지려 했던 것은, 개화기에 따른 의식이 남보다 뒤지지 않았던 결과였다. 금강을 대문으로 삼고 논산천과 강경천을 옆에 두어 삼남(三南)의 보고(寶庫)로 불리던 내포평야는, 미맥 위주의 주곡을 비롯, 모시와 해산물의 집산지로서도 조선시대 이래의 큰 장이었다. 더우기 강경상업학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박원태-김정자(金正子)씨 부부는 중앙동에 정착하자 봉래(鳳來)-학래(鶴來)-홍래(鴻來)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한편으로 막내둥이를 낳았고, 봉황과 학과 기러기의 날개 항렬보다 좀더 상서로운 영물을 찾아 부르니 그것이 곧 용래라는 이름이었다.

 저녁 노을이 유난히 짙어 놀뫼(黃山)라 부르던 채운산(彩雲山) 산자락과 부여를 잇는 놀뫼나루, 황산천과 황산교, 죽마(竹馬)를 타고 오르내렸던 서편의 옥녀봉(玉女峰)들은 뒷날 민요풍(民謠風)의 그윽한 가락을 홀로 읊게 될 한 시인의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키웠다.

 홍래 누이는 막내가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한시도 딴전 볼 겨를이 없었다. 부모가 연만한데다 하나뿐인 누이를 누구보다도 옴살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박시인은 홍래 누이를 따라 변두리로 다니며 노는 일이 잦았다. 채운산 너머 부투골, 낭청이, 까치말과 채운들 저쪽의 용답급, 돌꽂메, 두테골, 거름실 등 그들 오뉘의 발길이 미치지 않던 곳이 드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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