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37> 식자(食子)충신이냐 방록(放鹿)천신이냐

단순한 예로 얘기를 시작한다. 한나라 소후(昭侯)가 술이 취해서 잠이 들었다. 전관자(임금의 冠을 맡는 내시)는 소후가 추울 것 같아서 옷을 덮어줬다. 소후는 잠이 깨서 기뻐하며 물었다. “누가 옷을 덮어줬느냐?” 다들 전관자라고 했다.

소후는 전관자와 전의자(임금의 옷을 맡는 내시) 둘 다 함께 죄를 줬다. 전의자의 잘못은 직책을 다하지 못함이요, 전관자의 잘못은 다른 사람의 직책을 월권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추운 것은 아주 싫다. 그러나 타인의 직책을 침해하는 것은 해가 된다. 때문에 추운 것보다 더 심한 것이다.”

현명한 임금은 통솔하는데 있어 여러 덕목을 갖춰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신하가 직권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고 의견을 진술한 것과 실제가 부합되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리더십이다. 만일 월권했으면 사형에 처하고 말과 실제가 같지 않으면 처벌한다. 관직의 임무를 잘 지키고, 말한 것이 올바르게 들어맞게 하면 신하들이 서로 도당을 만들어 이익을 탐낼 수 없게 된다. 물론 전제 군주시대의 얘기다.

신하의 자세란 어떠해야 하는가. 악양(樂羊)이라는 위(魏)나라 장수가 중산국을 공격했다. 때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다. 중산국 왕이 그 아들을 인질로 삼아 공격을 멈출 것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왕은 드디어 그 아들을 죽여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냈다. 악양은 태연히 그 국을 먹었다.

위 임금이 참모에게 악양을 칭찬하면서 말했다. “악양은 나 때문에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참모가 대답했다. “자기 자식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 누구인들 먹지 않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돌아오자 위 임금 문후는 그의 공로에 대해 상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의심했다, 바로 저 유명한 ‘악양식자(食子)’이야기다.

여기에 대비되는 얘기도 있다. 노(魯)나라 사람 맹손(孟孫)이 사냥을 나가 사슴새끼 한 마리를 잡았다. 잡은 사슴새끼를 부하인 진서파(秦西巴)를 시켜 싣고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어미 사슴이 따라오면서 울었다. 진서파는 참을 수 없어서 새끼를 놓아주고 말았다.

맹손이 돌아와서 사슴새끼를 찾았다. 진서파가 대답했다. “울면서 따라오는 어미를 차마 볼 수 없어서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크게 노하여 그를 내쫓아버렸다. 석달 뒤 맹손은 진서파를 불러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다. 맹손의 마부가 물었다. “예전에는 죄를 물어 내치시더니 지금은 다시 불러 아드님 사부로 삼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맹손이 답했다. “사슴새끼의 아픔도 참지 못하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픔을 참을 수 있겠느냐?”

이 대목에서 한비자(韓非子)의 충고를 새겨본다.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은 실로 가관이다. 오장육부에서부터 욕지기가 올라와 굳이 괘념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하지만 물끄러미 바라볼 수만도 없을 지경이다. 무엇보다 ‘악양의 처지’를 자임하고 나서겠다는 ‘식자(食子)충신’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그런 열혈 충신들을 정치인, 고위공직자로 줄줄이 거느린 지금의 대통령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할 것이고 영원무궁토록 이 충만감이 이어지길 바랄 게 분명하다. 덩달아 국민들은 참으로 분에 겨울만큼 태평성대의 안온함을 느끼면서 당대의 치세가 요순시대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고 크게 만족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 식자충신들은 막상 그런 진퇴유곡의 상황이 닥친다면 제일 먼저 외국으로 내뺄 사람들 아니던가. 국회의원들을 비롯하여 고위공무원들 사이에 군 미필자나 면제자들은 왜 그리 많은가. 그들 아들까지 포함하면 상식을 뛰어넘는 수치다. 그럼에도 권력이란 아편덩어리는 실로 달콤하고 몽롱한 유혹이다. 하여 너도나도 ‘악양의 충성’을 마다하지 않는다.

최선의 지도자는 국민의 마음에 따라 다스리고, 차선의 지도자는 도덕으로 국민을 다스리고, 보통의 지도자는 이익을 미끼로 다스린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차악의 지도자는 형벌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다스리고, 최악의 지도자는 국민과 다투면서 다스린다.

작금의 문제는 최고지도자가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문제를 눈감고 외면하는 데 있다. 악양의 충신들은 차라리 가련한 존재들이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충성을 바쳐야 할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저급한 판단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머리는 되지만 내가 출세하기 위해서 자식의 안위 따위는 걱정 안 하는 철면피의 부류이거나 둘 중 하나다.

무엇보다 국정원이 뉴스의 핵심인 게 큰 걱정이다.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정보와 기밀을 수집하고 통제해야할 기관인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것은 물론 기밀공개를 자청했다. 가능한 한 뉴스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국정원의 소임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연예스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인지 시도 때도 없이 뉴스권을 장식한다.

하기는 헨리 키신저도 그런 푸념을 하기는 했다. “우호적인 국가의 정보기관은 있을지언정 우호적인 정보기관은 없다.” 정보기관의 속성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국정원의 명예가 국민 전체의 명예, 나아가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도 더 큰 것인지. 남재준 원장은 셈본부터 다시 배워야 할 판이다.

남원장이 국정원이 정권을 위한 기관이냐 국가를 위한 기관이냐를 몰라서인가. 답은 간단히 나온다. 남원장은 정권과 정부, 국가를 혼동할 정도로 법체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찌 유독 특정 정권만을 위해서는 그다지도 악양같은 식자충신 노릇을 하는지 속시원히 털어놓기를 바란다. 물론 국정원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말이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나 명예 운운하면 그것은 도리어 우스갯거리가 된다. 유명한 조폭들이 명예 운운하면 차라리 웃어넘길 수 있다. 불법 쿠데타를 눈 하나 깜작 않고 감행한 가증스런 존재들조차 명분으로 조국의 안녕과 발전을 입에 담는다. 참으로 말이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인정받지는 못하는 신묘한 수단이다.

송(宋)나라 예열(兒說)은 대단한 능변가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백마비마론으로 제(齊)나라 학자들을 설복시켰다. 그러나 그도 결국 흰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 말의 통행세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허공에 뜬 이론으로 일국의 학자들을 누를 수는 있어도 실물을 놓고 따질 때에는 관문을 지키는 관리 하나도 속일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역시 승리한 자에게는 진실에 관해 캐물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세상인심인가. 이게 선거제도의 폐단이다. 방중지원(方中之圓)이라는 말은 불교의 화두이거나 명리학의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해도 설명이 안 된다. 허나 이제 곧 네모 속에 동그라미가 있다고 우겨도 어찌할 수 없게 생겼다. 작은 조직의 섣부른 명예를 위해 모집단의 중차대한 이익과 안전은 내팽개쳐져도 된다는 논리를 인정해줘야 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치시대 독일의 선전 장관 괴벨스가 그처럼 뻔뻔스럽게 궤변을 늘어놓았을까. “선동의 제1의 가치는 거짓말이며, 거짓말도 백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때맞춰 스노든 현상이 주목을 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개인정보 비밀 수집을 폭로한 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움직임과 소신이다. 스노든은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침해되는 현상에서 못살겠다는 생각에 감시체계 폭로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스노든의 이유가 일리 있다. “현존하는 권력 구조가 모든 이들의 자유를 신장하는 대신 권력 자체의 영향력을 키우고 권력 자체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작동하고 있다” 그런 그는 “정부의 과잉 행위를 억제할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지금까지 봐 왔듯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자신을 옹호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몰아세운데 대해 “거대 감시체계와 관련된 정보를 폭로하는 어느 누구라도 그런 취급을 받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일단 에드워드 스노든은 노벨평화상후보로 추천받았다. 강대국인 미국이 탐탁지 않게 여기더라도 시민적 자유와 인권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정(鄭)나라에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뒀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갖고 가는 것을 그만 잊었다. 신발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서야 탁을 갖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했다.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시장에 왔을 때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물었다. “어째서 직접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가 대답했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어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얘기 아닌가. 자기 발이 원본이자 진짜배기인데도 못 믿겠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깜냥인가.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우습지만 진짜 자기 발은 못 믿고 본뜬(요즘식으로 사본인) 탁은 믿을 수 있다니. 참 가관이다.

본말이 전도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몸뚱이인지 분간을 못하겠다는 말 아닌가. 요즘 우리나라 시국이 딱 그런 형국이다.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에 대한 국정을 조사하겠다고 나선 국회의원들의 태도가 바로 차치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서양 말에 Wag the dog.(the tail wagging the dog)라는 게 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더니 바로 그 짝이다. 누가 탁이고 누가 발인가.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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