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밝히는 사람은 많지만 도를 몸소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치를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明道者多 行道者少 說理者多 通理者少)”
다소 무겁다. 뜬금없이 웬 곰팡내 나는 언설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한번 돌아보자. 한해도 저물어 가는 때인지라 왠지 모르게 허허롭고 쓸쓸함을 억누르기 어렵다. 그저 맹랑하게 한해를 마무리 짓기도 아쉽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때문에 앞의 가르침은 이즈음 아주 당연하고도 딱 들어맞는 교훈이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정신을 내던진 채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왔는지 돌이키는 데 적절한 언급이겠기에 그렇다. 애살스레 핑계를 찾을 수는 있으리라. 세상이 워낙 엉망이고 인심이 참으로 험악했노라고. 게다가 이런 흉흉한 삶터에서 먹고 사는 일이 좀 힘에 겹냐고 언구럭을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사람의 도리를 세우려면 그런 얌통머리는 모두 다 깨끗이 지워야 한다.
앞서의 송곳같은 지적은 바로 우리가 종종 입에 올리는 달마대사의 말이다. 따져보면 위대한 스승의 놀라운 췌마(揣摩) · 촌탁(忖度)의 경지가 드러난다.〔‘췌마’는 중국 전국시대 책사 소진(蘇秦)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간파하는 일종의 독심술.〕여기서 도(道)와 리(理)를 어찌할 것인지 배운다. 즉 도리에 대한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 새길 수 있게 된다. 물론 온몸을 내던져서 구도에 몰입했던 달마의 경지와 평범한 일상인들의 처지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애시당초 무망한 일이다. 다만 최소한의 도리가 무엇인지는 한번쯤 곱씹어봄직하다.
외경스럽기만 한 옛적 그 스승은 먼 훗날까지도 내다보고 타이른 듯싶다. 몇 마디 말 속에 담긴 쟁쟁한 뜻도 뜻이지만 왜 그다지도 실천에 미욱하냐고 꾸짖는 것만 같다. 달마는 우리네 김씨이씨들의 맹문이같은 속성을 귀신같이 콕 집어냈다. 딴에는 그 오래전에도 사람들 거개가 약삭빠르고 잔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에도 우리는 곧잘 그런 얼치기 모습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너도나도 도리를 외치지만 기실 도리와는 거리가 먼 삶들이기 때문이다.
도리란 당연히 사람다운 도리다. 그러나 실상은 어땠는가. 한번 살펴보자.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모두들 먹고사는 것을 핑계댄다. 너도나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댄다. 실제로는 비굴했거나 구차했기 때문이었노라고 솔직히 인정했다면 좋았으련만 그게 그리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면서도 항용 말로는 ‘바르고 떳떳하게’를 외쳐왔다. 하기는 그만큼도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아예 도리 따위는 묵살하고 제멋대로다. ‘누가 뭐랄까 보냐. 나는 구애치 않는다.’이다. 천둥벌거숭이거나 망나니가 아니면 그럴 수는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도리를 제대로 다하는가.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이웃으로서, 민주시민으로서 마땅한 노릇을 다했는가 말이다. 막상 그러지도 못하면서 늘상 ‘바르게 살자’를 입에 달고 산다. 심지어 ‘차카게 살자’고 몸에 문신을 박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자 이제 모두들 이 어처구니없는 가식과 허위는 벗어던져버려야 한다.
요는 이런 문제점들을 다 알면서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서경에도 그렇게 나온다. 아는 것은 어렵지 않고 그 아는 것의 실천이 어렵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식이라는 것은 얼마만큼 노력하면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자기가 얻은 지식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 때문에 옛날부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토록 강조해왔던 것 아닌가. 하물며 단지 지식이 아닌 사람의 도리를 행하고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저 간단하고 손쉬운 일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도리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제쳐놓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달마조사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좌선할 때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한 젊은 중이 나타났다. 그는 많은 책을 두루 섭렵했고 또 남들에게 현묘(玄妙)한 진리를 가르치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은 뭔가 막혀 있어 시원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개탄했다. 그는 “공자나 노자의 가르침은 예법과 법규일 뿐이고, 장자나 주역의 책은 묘함이 극진하지 못했다. 요즈음 달마 대사의 소식을 들으니 지극한 사람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니 내가 그 곳으로 찾아가리라” 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달마를 찾아가 아침저녁으로 배움을 얻고자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달마는 항상 단정하게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혼자서 생각했다. ‘옛사람은 도를 구할 때 뼈를 부수어서 골수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달마의 수도처 앞에서 내리는 눈이 무릎 위로 쌓이도록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달마는 고개를 돌리더니 그에게 눈길을 주고 물었다. “그대가 눈 속에 서 있는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에 젊은 중은 두 말 없이 자기의 한쪽 팔을 잘라버렸다. 수북이 쌓인 하얀 눈이 붉디붉은 피로 물들었다. 달마도 깜작 놀라 말로써 꾸짖었다.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하실 때에 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대가 지금 내 앞에서 팔을 끊었으나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뒤에 달마 대사는 그를 불러 인자한 말로써 위로했다. “그대가 이미 그렇게 하니 그대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바꾸어 주겠노라.”
이른바 신광(神光)의 단비구법(斷臂求法) 고사다. 초조 달마의 법맥을 이은 이조 혜가의 도(진리와도 통한다)를 찾는 마음가짐은 이처럼 서슬이 퍼렇다. 이쪽저쪽 돌아볼 겨를이 없다. 어디까지나 진리를 찾기 위한 정면돌파다. 어설프게 에둘러 가거나 망설임이 없다. 그만큼 단호하고 결연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 칼날 끝에 매달린 진리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여 후생들은 이같은 구도의 자세를 용맹정진이라 이른다.
이 세상에 손쉬운 달관은 없다. 진정한 도인이나 학자들은 도를 얻기 위해 혹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목숨을 던지고 몸을 바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한 평생을 다해 한길로 달려간다. 어찌 달관이 아무런 희생과 수고 없이 거저 터득되겠는가. 그런데 요즘 사회는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내 노력이나 피땀을 흘리지 않고 그저 화려한 명성이나 영예만을 누리려 한다. 대충대충 또는 건성건성 따내는 지위와 자격은 결코 명예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치욕스럽고 누추한 낙인이 될 뿐이다. 표절이나 대필로 따낸 박사학위와 각종 자격들, 돈으로 사는 학위와 아너십이 도대체 얼마나 뿌듯할 것인가. 그런 가짜 명예는 슈도 해피니스(pseudo happiness)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쓰레기만도 못하다. 그런 사이비와 가짜가 버젓이 고개를 들고 판치는 세상이 우리 사회다. 당사자들이 인두겁을 쓰고 철면피를 두른 것은 그렇다 치자. 그들이 끼치는 해악은 바이러스 병원균보다 더 공포스럽다.
리처드 도킨스는 영국 프로스펙트지의 여론조사 결과 노엄 촘스키, 움베르토 에코와 함께 세계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주목받는 과학자다. 그는 ‘만들어진 신’이란 책에서 과학적 논증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면서 과학계와 종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몰고 왔다. 최근 그는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The Magic of Reality)’이란 책을 통해 과학과 초자연적인 것을 대비했다. 바꿔 말해 진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설명과 설명의 적이란 틀을 만들어 어느 것이 유용한 수단인지를 보여준다. 가령 어느 탐정이 혼란스러운 살인사건을 맡았다고 치자. 그런데 어찌나 게으른지 문제를 풀어볼 시도조차 않은 채 사건의 수수께끼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손을 뗀다고 하자.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바로 사기꾼 혹은 협잡꾼 말고는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진실은 과학과 신화를 포함한다. 진실은 진리의 기초골재가 된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한때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일, 다시 말해 (기분이 좋거나 화가 난) 신 · 악마 · 마녀 · 정령 · 저주 · 주술 때문이라고 했던 일이 사실은 자연현상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흔했다. 종교적 이유에서건 심지어 정치적 이유로도 마녀사냥은 그래서 크나큰 죄악이었다. 과학이 아직 자연적 설명을 찾지 못했던 현상이라고 해서 보나마나 초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 한때 사람들이 화산 · 지진 · 질병 따위를 성난 신들의 짓이라고 여겼으나 알고 보니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날 과학이 풀어내지 못했던 숱한 진리와 진실을 신화나 종교에 떠맡겼던 사례가 많다. 지금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도무지 수긍하기 어렵다. 자연현상이 신의 노여움이라니, 평온하고 아늑한 자연환경은 신의 은총이라니. 도통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과학의 영역을 신화나 종교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무리가 많을뿐더러 진리와는 더욱 괴리를 만든다. 물론 여기서 종교와 신화의 역할을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다.
얼마전 타계한 넬슨 만델라는 마디바((Madiba·존경받는 어른)로 추앙받았다. 그가 만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거나 딴생각을 품었다면 그렇게 우러름과 존경을 받고 세상을 떠날 수는 없었을 테다. 차별받던 흑인 인권을 위해 일생을 오로지 한 곳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곁눈질이란 그에게 부도덕이자 신념의 붕괴나 다름없었다. 그가 존경을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한 눈 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여 존경의 마음을 담아 세상 사람들이 붙인 이름도 많다. 만델라의 부족에서 원로를 일컫는 마디바가 대표적이다. 또 ‘아버지’를 뜻하는 타타(Tata),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쿨루(Khulu)로 불리기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도를 듣게 되면 부지런히 그에 따라 행하고 일반인은 도를 듣게 되면 잊는 듯, 얻은 듯하고 미련한 사람은 도를 들은 다음 웃어버리느니라.” 노자 선생님의 말씀이다. 진정한 덕은 깊은 골짜기 같고 진정 흰 것은 검은 듯하고 크게 모난 것은 구석이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더라. 큰 소리는 들리지 아니하고 큰 모양은 보이지 아니하더라.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도는 이름이 없으나 오로지 도만이 주어서 이뤄지게 하더라. 도덕경의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올 한해 필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을 터이다. 한해를 여의면서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모두 붙들고 갈 수는 없다. 때문에 새해에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할 일이다. 단지 곁눈질 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과 진실을 향해 달리기를 기원한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