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뜨는 해는 어제 떴던 해인가. 아니다. 비록 해는 그 해일지라도 그대가 변했다. 어제의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아니듯이. 그러므로 그 해라고 할 수 없다.
하늘 밑, 해 아래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왜 그런가. 세상 모든 만물은 시작에서 끝으로, 또 끝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거개의 사람들이 변심과 변절만큼은 혐오한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닦고 가다듬기에 따라 곧고 한결같을 수 있게 마련이다. 하여 절개와 지조를 높이 산다.
느닷없이 웬 사설인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늘 아침 분매가 봉우리를 맺었다. 어느새 꽃잎을 열고 그 아슴한 향을 퍼뜨릴 날이 눈앞이다. 벌써 그런 철이 왔나 했다. 그러나 분명코 그리 됐다. 시시철철 시간이 흐르고 때가 바뀌는 데 미처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어지러운 세상사에 얼을 빼앗긴 채로, 혹은 무엇인가에 현혹돼서 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중 하나이지 싶다.
새해를 맞아 절개와 지조를 새삼스레 곱씹어보게 된다. 노자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는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남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여일해야 하고 남도 여일해야 한다.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노자의 어투를 빗대 말한다면 “자신의 지조(신념)를 이해하는 자는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의 지조(신념)를 이해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법하다.
나무는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한겹 두겹의 나이테를 두른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만큼 겹겹이 연륜을 보탠다. 하지만 나무 가운데서도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다만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 크고 단단해져 갈 따름이다. 대나무가 굳세고 곧게 성장하는 데는 무엇보다 대나무의 마디가 큰 역할을 한다.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줄곧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사시사철 불변하는 청청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 때문에 대나무는 오래도록 충신‧ 열사와 열녀의 굳은 절개의 상징이 됐다. 성품이 곧고 정의로운 사람을 일러 흔히 대쪽 같다고 하는 것도 대나무의 이런 성정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대나무를 두고 흔히 군자(君子)에 비유해 왔다. 잘 아는 얘기다. 또 허심청절(虛心淸節), 허심견절(虛心堅節), 포절지무심(抱節之無心)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것은 줄기는 비어 있으나 굳은 마디에 의하여 절조가 지켜지고 있다는 말이다.
대나무가 이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개탄하고 속이 썩었으면 그토록 속이 텅텅 비었을까. 그 한이 얼마나 가슴 아팠으면 마디마디 맺혔을까. 그러면서도 청죽은 말이 없다. 항상 만고풍상에 시달려도 외려 의연하게 짙푸른 색을 지킨 채 변할 줄을 모른다.
대나무를 일러 때로는 벽옥낭간불수진(碧玉浪玕不受塵)이라고도 했다. 곧 투철한 정신이 뚜렷하며 허식 없음이 낭간(옥의 일종)의 상쾌함 그대로이고, 사계절을 통해 변치 않는 벽옥(옥의 일종)과 같이 아름다운 줄기와 잎의 고귀함은 티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문에 그렇게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대나무는 평안(平安)이라고도 표현된다. 옛날 중국의 이위공(李衛公)이라는 사람이 어느 절에 가 보고 그 절의 대나무가 무척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웠다. 하여 그 절의 승려에게 매일 대나무의 평안 여부를 보고하게 했다는 고사 때문이다.
대나무 하면 뭐라 해도 죽림칠현(竹林七賢; 완적, 혜강, 산도, 향수, 유령, 왕융, 완함)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위진 시대에, 속진을 피해 죽림에 모여서 청담(淸談)으로 세상사를 잊고 한세상을 맑게 보낸 일곱 은사(隱士)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선비중의 선비로 우러름을 받는다.
이 고사(高士)들은 대나무를 삼청(三淸; 매화, 수선, 대나무), 삼우(三友; 松, 竹, 梅)라고 하여 늘 가까운 친구처럼 대하며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날 시선으로 본다면 납득되기 어려울지 모르나 그런 도저한 흉중일기(胸中逸氣)는 여느 도량으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렵다.
갈수록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부모의 존재마저 잊혀져가는 시대다. 때문에 효심에 관한 한 맹종죽(孟宗竹)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 오나라 맹종의 얘기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노모가 병이 나서 아무 것도 잡숫지 않고 오로지 죽순만을 찾았다. 때마침 겨울이어서 죽순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맹종은 눈 쌓인 대밭에 들어가 죽순을 찾았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어머님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감동했는지 눈물로 눈이 녹은 자리에 죽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죽순으로 죽을 끓여 마신 어머니의 병도 말끔히 나아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 그 뒤로 맹종죽이라고 하게 됐다. 그래서인가. 죽순은 맹종죽의 맛을 으뜸으로 친다.
대밭에는 대나무의 뿌리(땅속줄기)가 빈틈없이 꽉 엉켜 있어서 아무리 심한 지진이 일어나도 끄떡도 않는다. 때문에 지진이 심한 나라에서는 대밭이 지진에 좋은 피난처가 된다고 한다. 대는 이처럼 서로 우애하고 협동하는 미덕도 갖고 있다.
대나무 마디는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고 곧게 서 있을 수 있는 지지대의 역할을 한다. 만일 대나무가 마디 없이 하나의 줄기로만 돼있다면 웬만한 바람에도 쉽게 부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마디가 있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쑥쑥 키를 뻗는다.
오래 산 대나무는 통이 굵고 마디가 길다. 그저 생각 없이 들여다보면 대나무가 자라는 것이 마디가 무한히 생겨나는 걸로 알기 쉽다. 하지만 마디 수는 죽순으로 솟아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고 한다. 다만 마디가 길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마디가 자랄 때마다 그 대가 겪었을 고초와 사연은 그리 간단치 않다. 얼마나 가뭄에 시달렸으며, 얼마나 비바람과 찬서리를 맞았을까를 감안해보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하늘로 뻗는 대나무, 마디를 키우면서 자라는 대나무에는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는 마디들이 이어진다. 마디들이 없으면 대나무가 그처럼 하늘 높이 뻗어 자라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시간의 마디들이 이어진다. 시간의 마디들은 우리가 어디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채게 한다.
마디는 곧 매듭이다. 매듭이 없다면 새로운 시작이란 아예 이뤄지기 힘들다. 한 마디의 끝과 시작이 이어지는 시기다. 지난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간을 얻게 되는 이 시기는 우리 시간의 마디를 만드는 때이다.
지나간 마디에서 뜻했던 일들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면 다음 마디를 만나면서 다시 후회 없이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 된다. 때문에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허비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그것이 시간의 마디를 잘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을 산뜻하게 시작해야하는 이유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라면 인간의 한 평생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1년의 단위란 여기서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절대자라면 수백만년이나 단 1초나 별반 다를 것도 없을 것 아닌가. 따라서 굳이 하루니 한달이니 1년이니 하는 시간의 마디(분절)조차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한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 인간에게 시간은 크나큰 마디이며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