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유명한 사람이 늙으면, 늙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저 원로라고 불린다. ‘원로’라고 남발돼 불리는 이 말은 기실 복잡한 속성을 갖는다. 무엇보다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할 것이냐는 문제다. 어떤 사람에게는 원로로 보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뿐, 진정 당대의 현실을 걱정하고, 미래를 헤아려 빛을 밝혀준 참 원로가 과연 있는가? 저마다의 주장이 넘쳐 분분한 논쟁으로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라면 더욱 잣대가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그저 나이가 많은 이를 대접하려는 뜻에서라면 굳이 원로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호칭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늙음에 대한 확고한 존경의 표현으로는 앞에 ‘노(老)’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된다. 정치인이라면 노정치인, 사업가면 노사업가, 시인이라면 노시인, 교수라면 노교수 하면 된다. 그런 것을 지나치게 높여주다 보니 웬만하면 원로고 어지간하면 어른이다.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거벽(巨擘)이라고 한다. 거장의 뜻이라고 보면 된다. 또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을 태두(泰斗)라 이른다. 이들은 주로 전문성을 위주로 나누는 평가다. 반면 나이가 많아 덕망이 높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기숙(耆宿)이라고 부른다. 원로와 뜻이 상통한다.
그런데 김남조 시인의 며칠 전 말 한마디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몹시 켕긴다. 김 시인은 청와대에서 열린 원로회의 위원 오찬 간담회에서 강도 높게 ‘세종시 원안’의 문제점을 비판했다고 한다. 그가 원로로서 했건 시인으로서 했건 모두 나름의 고뇌 끝에 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실제 존경과 우러름을 받고 있는지와는 상관 없이 그 시인을 ‘국민원로’라 치자. 국민원로회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니 굳이 시비를 걸 필요가 없잖은가. 그런데 그 시인은 대통령이 처한 어려움에 몹시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 가꾼 서울인데 행정권을 이전해줄 수 있느냐며 한탄한 모양이다. 그는 특히 원자력을 파는 등 여러모로 바쁜 대통령에 대해 국민들이 촛불시위로, 세종시 문제로 일을 못하게 하느냐는 투로 대통령을 뼈에 사무치게 염려한 모양이다. 끝내는 ‘대통령님과 총리님이 힘을 내시라’고 한껏 아부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원로시인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 방향이 조금 착오적이지 않은가 싶다.
정작 시인이 걱정해줘야 할 것은 으리으리한 청와대 권력이 아니라 누추하고 쓸쓸한 곳의 잊혀진 사람들 아니었을까. 천신만고 끝에 남편과 가장의 장례를 치른 용산의 유족들, 직장을 잃고 감옥에 갇힌 노동자들, 엄동에 집철거로 추위에 떠는 사람들, 폭설로 연탄배달이 안돼 냉골에 떤 독거노인들, 생활비가 없어 세 딸의 목숨을 끊고 자신도 목을 매단 엄마… 그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한편의 따뜻한 시라도 썼더라면…
그 모임에 참석한 다른 원로들도 그만그만한 덕담 수준의 조언을 한 것으로 보도된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대통령의 인식에 동조하고 초청해줘서 고맙다는 말품앗이 수준에 머무른 내용일 것은 너무도 뻔하다. 짧은 시간동안에 그 많은 이들이 얼마나 깊이 있는 충언을 할 수 있었을지 짐작이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했다.
청와대 대변인 말에 따르면 세종시 문제가 주요 얘깃거리로 오르내린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대립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그걸 지적하고 그 해법을 주문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원로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갈등 해소에 대한 언급을 외면했다. 더 큰 문제는 오늘날 이런 갈등상황이 누가 빚어낸 현실이고 누가 시발점이었는가에 대한 헤아림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권력자에게 ‘당신이 희망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못살아’ 식으로 아부성 주문이나 건네면서 그걸 자문이라고 했다니 기가 찬다. 그들은 그것으로 국민원로의 노릇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근사한 오찬이었다고 흡족해 했을테니 그런 원로(?)를 둔 국민들만 불쌍해진다.
그렇지만 원로들이여, 권력의 고충과 애로에 대해서는 굳이 그처럼 염려하고 속을 끓이지 않아도 되니 마음 놓으시길. 충직한 청와대 참모진들과 우국의 일념으로 날을 새우는 장관, 국회의원들이 얼마든지 다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므로.
우리는 예로부터 덕의 기준을 명시하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 윗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은 ‘덕위상제(德威相濟)’다. 즉 글자대로 풀면 “덕과 위엄으로 서로 건진다”가 된다. 다시 말해 덕은 위엄으로 건지고, 위엄은 덕으로 건진다는 말이다.
덕과 위엄은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덕만 있으면 사람 좋다는 소리야 들을 수 있겠지만, 위엄이 서지 않는다. 반대로 위엄만 내세우고 덕이 없어도 안 된다.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견뎌도 속으로는 반발한다. 결국 바른 말 하는 사람은 떠나고 아첨하는 사람만 남는다. 다시 말해 어른으로서 인정받는 원로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로라고 하기엔 낯간지러운 사람들이 꼭 원로대접을 받겠다고 설친다. 무엇보다 원로다우려면 출처진퇴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되나 못되나,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가리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인사는 원로가 아니다. 그저 체면이나 염치도 모르고 뻔뻔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약방의 감초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노추(老醜)함으로 뭉쳐진 우중충하고 추레한 늙은이까지 설쳐댄다. 그들이 모두 원로일수는 없다. 더더구나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석에 앉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국민 모두의 존경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조용히 있으면 호호야(好好爺)란 평판이라도 얻으련만 다들 무엇이 그리 자랑스럽다고 협견첨소(脅肩諂笑)들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원로들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언행이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원로는 연륜만큼 믿음을 주고 내일을 내다보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또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과는 관계 없이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헤아려야 한다. 더구나 자신의 처지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존경받고 덕망을 받는 이가 바로 원로다.
곳곳에 무조건 나이나 기득권만으로 원로행세 하려고 달려드는 꼴불견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원로란 단순히 세월을 헤쳐 온 연장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참 어른’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 과잉의 시대, 비정치 분야의 원로들이 스스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겠다. 그렇지만 멀리서 바라만 봐도 힘이 되고 그저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든든한 위안이 되는, 거목과 같은 원로는 분명 우리사회에 꼭 필요하다 .
조직이나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려면 원로의 역할이 중요하다. 학식과 덕망, 경륜을 갖춘 원로의 말과 행동은 국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원로가 제대로 처신해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나라가 바로 선다. 누구보다 열심히 땀 흘리고 고민했던 원로들은 이제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의 ‘멘토’로서 할 일이 많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반목과 갈등이 심할수록 곧고 바른 발언은 의견 통합과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한다.
모름지기 원로라면 장자(莊子)의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착륜옹(斲輪翁)처럼 직언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제환공의 으름장에도 전혀 굽힘없이 자신의 소견을 내놨다. 원로란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보다는 꼬장꼬장한 주견으로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아집으로 똘똘 뭉쳐 제 이익에만 눈멀고 아첨의 말과 글로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노회(老獪)한 영감태기들과는 품격이 달라야 한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