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무지나 몽매는 크나큰 죄악은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는 모르는 것도 악폐로 치부되기는 한다. 그러나 거짓되고 뻔뻔함은 죄악이 된다. 그것도 공적인 권한과 책임을 일국에서 가장 크게 짊어진 위치에 있는 자라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악덕이 아닐 수 없다. 단 한 사람의 빗나간 가치판단과 어리숙한 선택으로 인해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온 국민이 화를 끌이고 있다. 때문에 국가적으로 큰 위기이기도 하거니와 국민들마저 집단히스테리에 시달리는 현실이다.
흔히 중국의 3대 바보 황제를 서진(西晉)의 혜제 사마충.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 그리고 당의 순종(順宗)으로 꼽는다. 거기에는 못 끼지만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劉禪)도 여러 일화를 남긴다.
여기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마충과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劉禪)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다만 동진의 安帝, 당의 순종은 선천적으로 저능이므로 논외로 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바보일 때보다 지적 저능아 수준정도 바보의 경우 해악이 제일 크기 때문이다
서진의 사마충, 사마염의 아들로 사마중달의 증손자이다. 사마중달이 누구인가. 천하의 제갈량과 대적했던 영웅이고, 사마염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걸출한 인물이다. 그런데 어찌 그 후손 중에서 바보가 나왔을까. 그는 중국의 3대 바보 황제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만큼 노둔했다.
어느 날 밖에서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자 “저건 국가 거냐, 아니면 개인 거냐?”고 자못 심각하게 물어봐 주변 신하들이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어죽는다고 보고를 받았다. 이 바보황제는 도무지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되물었다. “백성들이 먹을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
이처럼 바보이다 보니 황후 가남풍에게 휘둘려 팔왕(八王)의 난의 단초가 돼 국가가 엉망이 돼버렸고 결국은 자신도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유비의 아들 유선, 한마디로 얼이 빠졌다고 할 정도의 멍청이다. 공명같은 명재상이 보좌할 때는 그 우둔함이 가려졌으나 환관 황호같은 간사한 무리에 휘둘려서는 그 바보의 진면목이 여실히 나타났다. 이런 아둔한 자가 군주가 되면 해악이 제일 크고 나라를 망치게 되는 건 뻔한 이치. 적국의 수도에 연금 생활을 했지만 자기 잘못으로 나라가 망한 것에 분노할지도 모를 정도의 바보였다. 그래서 대우해주는 대로 말년을 안분하면서 잘 지냈다.
사마충과 유선의 공통점을 한번 보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금수저인데다 아버지가 모두 영웅이었다. 또 세상의 고난을 모르고 온실에서 곱게 자랐다. 후계자 선정을 할때 아버지가 고민을 했으나 결국은 낙점됐다. 즉 아버지는 그 자식의 우둔함과 바보스러움을 알았으나 인정에 끌려 후계자로 선택했다. 주변에서 보좌를 잘 할 때에는 그런대로 꾸려갔으나, 모질고 편협한 황후나 탐욕스러운 간신에 이끌리면서 나락에 떨어졌다. 중간에 하야할 기회가 있었지만 기득권 논리에 의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기회를 놓치고 마침내는 자신뿐 아니라 나라까지 망치게 됐다. 거의 모든 항목이나 상황이 지금 대통령과 흡사하다. 그래서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을 보자.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시계줄을 사고,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빗을 산다. 곰살맞고 갸륵한 순정일 수도 있겠다. 작가가 그것을 노렸을 테다.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다. 그런 점에서 결과만 놓고 보면 주인공들은 참 바보들이다.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일이나 얼마든지 그런 안타까우면서도 가슴 애잔한 아이러니가 일어날 수도 있다. 허나 한 조직이나 나라의 일에 이런 일이 있어서 되겠는가. 그래서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해 내각을 만들고 참모진 비서진을 꾸리는 것 아닌가.
‘바보’란 자기자신의 의지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선천적인 기질이나 신체조건에 후천적인 운명이나 환경에 따라 결정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나 한 조직의 책임자로 자리 잡으려면 절대적으로 ‘바보급’‘이나 박약한 의지력의 소유자는 피해야 한다. 선출직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터져서 날로 그 파문과 충격을 더해가고 있다.
불교에서는 바보와 똑똑함을 가르는데 ‘근기’를 언급한다.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나눈다. “상근기를 가진 자는 바보같이 어리석게 보이고 중근기를 가진 자는 지혜롭게 보이고 하근기를 가진 자는 똑똑하게 보인다.”고 했다.
바보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어떤 사람들과 학생들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사람‘ 또는 ‘바로 보는 사람’이라는 답이다. 참으로 색다른 생각이다. 곰곰이 그 뜻을 음미해 보면 그럴싸하기도 하다. 일부러 바보가 되려는, 그리하여 결국은 현명함을 이루려는 해석인 듯 싶다.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저마다 나름대로 희망적인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도 현실은 어찌 그리 팍팍하고 황폐한가. 오로지 권력의 최상층부가 그다지도 무능하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있었던 까닭이다. 자기 욕심이 앞서고 국가의 명운이나 위상같은 것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인연은 의사결정의 맨 앞에 있고 공적인 지휘계통은 무시된 탓이다. 이러고도 국가의 안위를 입에 올리고 선진 국가의 좌표를 운위할 수 있는가. 정녕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이가 현 시점의 대통령이다.
흔히들 인간을 말할 때 대성(大聖)은 대우(大愚)와 같다고 한다. 큰 인물은 큰 바보와 같다는 말이다. 일종의 인간학인데 현실적으로는 거리가 멀다. 대우(大愚)는 적고 외려 지우(至愚)들이 설쳐대는 게 요즘 세상이다. 격이 다르게 그런 경지를 논할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장 흠결이 적은 리더를 뽑기 위한 선출절차상의 검증이 시급하다. 다시는 지금의 이런 리더와 같은 졸렬하고 치졸한 지도자가 나와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어리석음을 크게 대우(大愚),,치우(痴愚), 지우(至愚)로 나눌 수 있겠다. 대우는 이미 어리석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현자(賢者)를 이른다. 치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팔불출로서 지능정도가 모자라는 정신박약자를 가리킨다. 지우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멀리 보지 못하고 어리석음이 지극한 소인배를 나타낸다.
인격을 뜻하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나 사람이라는 퍼슨(person)은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했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인간의 얼굴 자체가 뭔가 숨기고 있는 가면이라는 뜻이다. 얼굴도 가면인데 여기에다 가면을 쓰면 오히려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성욕이나 공격적 성향이 튀어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위선과 가식의 이중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가면을 쓰면 더욱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숨겨진 위선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가면 파티에서 가면이 벗겨지면 그 사람의 운명은 다한 것과 마찬가지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가면 파티의 순기능도 있다. 억압된 본능과 욕구를 발산하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이다. 그런 카타르시스를 통해 다시 규율이 엄격한 일상생활로 복귀하게 된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가면도 쓰지 않은 채 국정을 사적 업무로 처리한 대통령은 얼마나 뻔뻔하고 위선적인가. 그런 대통령을 믿고 우리는 살았다.
움베르토 에코는 특히 비극에 맞선 희극, 웃음과 농담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작가였다. 에코는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를 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당신과 나 모두가 가진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 모두가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태도가 사뭇 동양적 사고와 닮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가진 것은 양식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것에도 쉽게 만족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풀어보면 현실이 비극적이고 참담할수록 유머와 풍자를 잃지 말자는 뜻쯤 될까. 한 아둔하면서도 고집불통인,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한 여성대통령, 그 어리석고 심신이 미약한 여자의 허점을 파고들어 수십 년동안 상왕과도 같은 권력을 휘둘러온 중국 악덕여제 기황후나 가황후보다 더 가증스럽고 간교한 여인 최순실. 그밖에도 많지만 이 두 여인에 의해 어지럽혀지고 더럽혀진 국가질서가 참으로 한스럽고 암담하다. 이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기까지 한 오늘의 우리나라 현실을 에코의 유머러스한 상상과 해학적인 놀이인 대답법으로 엮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란 책에 나온 문답으로 엮어본다. 일부만 발췌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개같은 삶이외다(디오게네스). 한바탕 곤두박질을 친 기분입니다(이카루스). 내 눈에는 인생이 검은 빛으로 보이오(호메로스). 너무나 숨막히지 않아요(데스데모나: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여주인공으로 남편 오샐로에게 교살당함)? 죽을 맛입니다(페르세포네). 재해보험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노아)? 정신 차려요, 목 잘리기 전에(로베스피에르). 이제 가망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리빙스턴). 곧 돌아오겠소(오디세우스). 천국에 온 기분입니다(단테). 잘 돌아갑니다(갈릴레이).”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안목이 있는 사람만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들의 대표를 뽑을 때 보다 감식안을 갖고 임해야 한다. 스핑크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