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41> 아주 실없는, 허나 매양 실없지는 않은…

‘절실하면 스승이 찾아온다.’ 스승이자 벗처럼 지냈던 선배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었던 얘기다. 아주 오래전 철부지 스무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그 말을 무심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사실이지 그즈음 처지는 절박했는데도 대응은 천하태평이었다. 어지간했다. 사십년이 가까워지는 지금에야 그 타이름이 속깊은 가르침으로 들린다. 그동안 스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존경할만한 스승이 계셨는데도 그 존재를 깨닫지 못했거나 소홀히 대우했거나 둘 중 하나다. 절실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둔해도 참 아둔하다. 아니 미련한 거다. 이미 시간은 저 머나먼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 선배도 스승이었다. 헌데도 미처 몰랐다. 그저 스승이란 먼 곳에 있는 줄만 알았다.

세상사 이치란 다 그런가. 매사가 내게 절실해야만 말이 되고 얘깃거리가 된다. 이웃집에 불이 나도 그저 그런가하다가 내 집 전기담요가 과열로 눌어붙어야 화들짝 놀란다. 다시 말해 내 발의 티눈이 남의 목숨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거다.

‘식이위천(食以爲天)’ 이란 말만 돌이켜봐도 그렇다.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라는 뜻이다. 곧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 아닌가. 지금처럼 풍족한 세상에 누가 그까짓 하찮은 먹는 것 갖고 고민하느냐고 비웃지 마라. 갖춰놓고 먹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죽지 않기 위해 근근이 먹는 것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갈수록 부자는 거부가 되고 빈자는 완전히 빈털터리 거렁뱅이가 돼가는 구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풍요로운 세상에 세 끼 밥을 다 챙겨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 모두 골고루 제대로 먹게 만드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또 그과제를 푸는 게 바른 정치의 기본이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보편적 복지의 첫걸음인 게다. 그러나 정치꾼들은 선거 때만 복지를 상품화해서 널리 선전하고 팔아먹었다. 그러고 이제 와서는 나 몰라라 한다. 물건 팔 때는 열 올리고 애프터서비스는 아예 없는 몰염치한 장사꾼이나 다름없다.

옛말에 제 배 부르면 종 배고픈 줄 모른다는 말이 있잖은가. 요즘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이 뼈에 사무치게 새겨야 할 송곳같은 말이다. AI(조류인플루엔자)비상으로 키우던 닭을 출하하지 못해 사료비 부담에 비관자살한 농민이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으면 목숨까지 버려야한다는 말인가. 하고 많은 정치인, 공직자들이 그 농민의 찢어지는 가슴을 한번쯤이라도 헤아려보기나 했을지 의아스럽다.

이런 배경 때문에 새삼스럽지만 ‘확철부어(涸轍鮒魚)’ 고사를 떠올린다. ‘푹 패인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갇힌 붕어’라는 뜻이다. 장자(莊子)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장자는 왕후에게 무릎을 굽히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보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보니 살림이 매우 궁색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어느 날 장자는 굶다 못해 감하후(監河侯:강물을 감독하는 관리)에게 양식을 좀 꾸러 갔다. 감하후는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어 둘러댔다. “좋네. 내가 곧 고을에서 조세를 거둘 걸세. 그러면 자네에게 삼백금쯤 빌려 주겠네. 좀 기다리겠는가?” 당장 배가 고파 죽겠는데 2,3일 뒤에 거금이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체면 불고하고 찾아온 자신을 그렇게 대하자 장자는 화가 나서 말했다. “고맙지만 그 때는 아무 소용없네. 내가 어제 여기로 오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푹 패여 고인 물에 붕어가 있었네. 그래서 내가 물었지. ‘붕어로군. 여기서 무얼 하지?’ 붕어가 대답했네. ‘나는 동쪽 강에서 살던 물고기입니다.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몇 접시 물을 가져다가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 때 내가 말했어. ‘알았다. 내가 지금 남쪽으로 가서 오나라와 월나라 왕에게 유세하고 난 뒤에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가 자네를 구해 주겠다. 괜찮겠나?’ 이 말을 들은 붕어는 성을 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늘 살던 곳을 잃어버려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물 몇 잔만 있으면 내가 살아날 수 있는데 당신이 기다리라고 하니 이젠 틀렸소. 나중에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게 나을 거요’라며 눈을 감았네. 자, 그럼 이만 가보겠네.”

지금 우리 사회에 몇 접시의 물이 필요한 붕어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난다.그들에게 당장 생명수와 같은 물을 끌어다 주는 것은 화급을 다투는 일이다. 그런 그들에게 ‘조금만 참아라, 인간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따위의 뜬구름같은 얘기는 허망하고 허탈한 맥빠진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신통력이 무한한 감로수라고 해도 당장에 쓰이지 않는다면 한 접시의 물만 못한 법이다. 그것은 바로 때를 맞춰 쓰지 않으면 그 어떤 귀한 물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곤궁하고 허기진 국민들에게 진실로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한가한 태평성대의 노랫가락 따위가 아니다. 당장 한 그릇의 물과 같은 일자리와 함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생계비다. 아주 치열하다 못해 심지어 몇백대 일의 경쟁률을 보이는 공무원시험 얘기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실업급여를 받는 실직자들의 수는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그만큼 먹고살기 위해, 아니 일거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늘 살던 물에서 벗어나 있는 수많은 실직자들, 아직 물에서 살아본 적조차 없는 청년 실업자들, 모두가 우리 사회의 물이 급한 삶들이다.

하지만 정부나 공직자들의 대응을 보면 세월이 낙락한 모양이다. 절박한 국민들의 아우성쯤이야 안중에 없다. 다급한 그들이 당장 절실히 요구하는 목소리들은 공직자들 귀 근처에도 못 미친다. ‘번듯한 술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직자들이다’ 요사이 시중에 떠도는 푸념들이다. 그저 아무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다. 꼭 선거철이라서만도 아니다. 그만큼 공직자들은 시절이 좋고 여유가 넘친다는 뜻도 된다. 곤경에 처한 주민들과 공직자들이 따로 겉도는 세상, 이런 현실을 그대로 간과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맹자(孟子)가 강조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자세는 오늘날 공직자들의 기본자세가 돼야한다. 지금 목마른 이들에게 당장 절실히 요구되는 물을 공급해 주는 일, 주민들의 고충과 애로를 절절히 새기고 해소해주려는 자세가 바로 공직자들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덕목이다.

꼬체비예, 본디 유랑객이나 떠돌이를 뜻하는 러시아말이다. ‘꽃제비’라는 말로 바뀌어 가족이나 친인척 등 돌봐줄 사람이 없어 유랑 걸식하는 북한사람들을 가리킨다. 한때 우리나라가 북한의 꽃제비들을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천하태평이다. 이처럼 양철지붕같이 달아올랐다 후딱 식고 마는 것이 우리네 본성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외려 이제는 북한의 꽃제비를 걱정할 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정신적 꽃제비가 된 것은 아닌지 냉정히 꼽아보자.

절실함과 절박함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절실함이 사무쳐 급박하게 되면 절박함이 되기 때문이다. 절실함과 관련해서 얼마 전 어느 선배의 조언이 귀에 맴돈다. 바로 논어에서 자하의 말이다. 두루두루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서부터 생각해 나가면 인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장(子張)’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중에서도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라는 말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간절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한다”는 말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본질을 묻되, 구체적으로 탐구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본질에 대한 질문이 구체적 현실과 유리되면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이 되어, 진정한 지혜와는 거리가 멀게 되지 않던가.

삶을 살아갈 때 피할 수 없는 것이 물음이다. 게다가 절실한 물음이 없으면 삶이 물렁해진다. 그 물음의 절실함만큼 삶은 단단해지게 마련이다. 절실한 물음이란 삶의 무게를 닮고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묻는다는 것은 단지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곧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되새기려는 과정이다.

세상에 절실하지 않게 구하는 것이 손쉽게 얻어지던 적이 있던가. 아무런 수고나 간절함 없이 거저 손에 쥐어지는 게 무엇이던가. 논어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으면서 공자(孔子)를 제대로 예우하기는커녕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던 들뜬 분위기에 덩달아 휩쓸렸던 경험이 있다. 그처럼 허무맹랑한 것이 세상인심이다.

도리(道와理)라는 것도 그렇다. 어느 깨우친 이(달마조사)의 가르침 중 중요한 글자만 새기면 이렇다.(지난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밝히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말하는 것보다 통하는 것이 더 요긴하다. (明道者多 行道者少 說理者多 通理者少)” 다시 말해 자기부터 살피는 것이 도리의 속성 아니던가. 언뜻 요즘 세태가 비춰진다. 서푼어치 쪼가리 지식을 무슨 대단한 철리나 되는 양 그저 주저리주저리 나불대는 것이 보통이다. 조금도 계면쩍은 기색 없이 외려 기세등등 날뛰는 것이 제 자랑인줄 안다. 엄격히 돌아볼 줄 모른 채, 앞뒤 안 가리고 천둥벌거숭이 꼬락서니를 내보이는 종편 방송들이 대표적이다. 자기 도리는 다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인륜과 도리를 외쳐댄다.

누가 정치를 모르던가. 너도나도 전문가요 도나캐나 평론가다. 그처럼 통속화되고 널리 개퍼지듯 퍼진 것이 정치이고 재담꾼들이다. 그런 것을 마치 자신만이 독보적 존재인양 젠체하고 우쭐대다니 이런 아둔함이 또 어디 있는가. 맹문이들이여, 부디 깨닫기 바란다.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한술 더 떠 나만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점을. 그런 뒤에는 아는 것을 제대로 행하고, 말로만 따따부따하지 말고 진정으로 통(소통)하도록 하라는 것을.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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