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는 고려말 개경에 나타나 쇠를 먹어 치우고 조선이 세워지자 사라졌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코끼리 몸에 소의 발, 곰의 목에 사자 턱, 호랑이의 얼굴에 물소의 입, 말의 머리에 기린의 꼬리를 단 모습이었다고 한다. 쇠를 먹어 치움으로써 보통의 무기로는 죽일 수 없는 동물이라고 해서 불가사리(不可殺伊)라고 했지만, 오직 ‘불’로써 죽일 수 있어서(可殺伊) 불가사리이기도 하다.
흔히 탐욕스런 사람을 일컫는 말로 불렸는데 나쁜 꿈을 물리치고 병이 들어오는 걸 막아 준다며 굴뚝에 불가사리 모습을 새기기도 했다. 경복궁의 아미산 굴뚝에도 새겨 넣었고, 일반인에겐 죽지 않는 불사신으로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이 되기도 했다.
요즘엔 스스로 분수를 지키고 족함을 안다고 하면 세상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것을 높고 깨끗한 덕목으로 존중해주기 보다는 마치 능력부족이나 궁핍함에 대한 변명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크다. 그만큼 사회가 ‘더 많이, 더 높게, 더 크게’를 외쳐온 탓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제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든다. 또 과욕은 필시 화를 불러온다.
인간은 본시 탐욕 덩어리였을까? 그에 대한 교훈적 해답을 독일 민담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 사람 수명은 서른 살이었다고 한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면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서른 살로 정했다는 것. 그런데 당나귀가 달려와 하는 말. “하느님, 그렇게 오래 살면 저는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줄여 주십시오.” 해서 당나귀 수명을 십이 년 깎아 십팔 년이 되게 했단다.
그랬더니 개가 찾아와서는 “저는 그렇게 오래 뛰어다닐 수가 없으니 저도 줄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해서 십팔 년을 줄여 십이 년이 되게 해줬다. 이번에는 원숭이가 쫓아와 “저는 사람들을 웃기고 재롱이나 떨면서 사는데 늙어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깎아 주십시오.” 하여 십 년으로 줄여 줬다.
그런데 사람은 아니었다. 하느님께 찾아와 “삼십 년은 너무 짧습니다.” 하고 화를 냈다. 그러자 하느님은 당나귀와 개, 원숭이에게서 줄인 것을 모두 합쳐 사람에게 주었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은 팔십이 됐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사람은 사는 동안 당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하고, 개처럼 헐레벌떡 뛰어다녀야 하며, 원숭이처럼 먹을 것을 던져 주는 이 앞에서 재롱을 떨고 바보짓을 하며 살게 됐다는 얘기다.
여기서 자람과 모자람을 놓고 인생의 깊은 지혜와 통찰을 드러낸 선비를 보자. 안분과 지족에 대한 가르침이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조선중기 학자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저 유명한 ‘족부족(足不足)’이란 시에서 인생의 자족과 탈속이란 경지를 드러낸 바 있다. 오늘날 오로지 물질과 속도에만 매달려 있는 우리들이 삶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내용으로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떳떳함이 이만하면 가난도 명예로울 터이다. 모두 40구 280자인데 ‘足’자만을 운자로 사용한 장편으로 특이하면서도 울림이 크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며, 소인은 어이하여 언제나 부족한가 (君子如何長自足 小人如何長不足)
부족해도 만족하면 늘상 남음이 있고,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不足知足每有餘 足而不足常不足)
넉넉함을 즐긴다면 부족함이 없겠지만, 부족함을 근심하면 언제나 만족할까?(樂在有餘無不足 憂在不足何時足)
<중략>
내 즐길 바 함께함에 진실로 때가 있어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족하도다.(同吾所樂信有時 卷藏于身樂已足)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 능히 자재로우니 하늘도 나를 보고 족하다고 하겠지(俯仰天地能自在 天之待我亦云足)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전한 소유욕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탐욕은 문제다. 탐욕은 끝을 모른다. 하나를 가지고도 충분한데도 또 하나를 더 갖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마지기 논을 가진 사람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의 논을 뺏으려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탐욕은 더 많은 돈, 더 높은 권력, 영원할 것 같은 명예를 쫒게 된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틀에서는 내가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하나를 더 뺏어 와야 한다. 그 결과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게 된 인생은 과연 행복할까? 일시적으로는 물질과 권력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희생 없는 대가는 없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쥔 대신 존재의 허망함과 인간의 도리를 잃어버린 삶이 되고 말았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래도 한번 가져보고 싶다고? 그것이 바로 무모하게 불속에 뛰어들어 죽고 마는 부나방의 충동이다. 곧 과분(過分)이라는 달콤하지만 중독성 강한 유혹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탐식증은 가관이다. 동네수퍼마켓이 할 일마저 빼앗아가는 판이니 그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불현듯 이솝우화 하나가 머릿속을 스친다. 고깃덩이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그것 마저 빼앗기 위해 물고 있던 고기마저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개의 이야기다.
재벌들의 무분별한 사업확장과 끊임없는 기업인수 경쟁은 오히려 부실기업을 크게 늘렸다. 매출신장과 업역 다각화라는 허울 아래 탐욕의 멈춤이 없다. 마치 불가사리 쇠 집어먹듯 한다. 분수를 모르고 과욕을 부리는 개인들도 역시 딱하기는 매 한가지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가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뜻을 제대로 새겼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만 살고 너는 죽어야 된다는 제로섬 게임은 벌이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지족’을 깨우침이 중요하다. 재벌기업들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알 때 모두가 함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욕심이 적으면 인생이 행복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