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下宿)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선배에게 이끌려 하숙집을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1학년 때 하숙을 했던 집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 새로 이사를 한 하숙집은 일제시대 공주교도소 소장이 사용했던 관사여서 집이 굉장히 크고 멋이 있었다.
집은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금강과 공산성이 한눈에 보였고, 붉은 벽돌의 단층 양옥집이었는데 정원에는 십여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와 느티나무, 각종 꽃나무가 가득하였다.
나는 선배 두 분과 셋이서 방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방은 관사의 응접실을 개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대학생 셋이 사용하기에는 썰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컸다.
나는 국어과 2학년이었고 선배님 두 분은 수학과 4학년이었다. 그런데 두 분은 마치 인생을 달관한 칠십대 노인들처럼 말도 느리게 하고, 걸음도 느리게 걸으며 완전히 극노인 행세를 했다.
전공인 수학 공부는 내가 안 볼때만 하는지 도무지 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가끔 주역 책을 펴놓고 확률을 따지며 점을 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점이 끝나면 “장공, 오늘은 술을 마시라는 점괘가 나왔으니 기분좋게 한잔 하세. 허허허 ” 라고 웃으며 술을 마시러 밖으로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소설가인 “이외수” 씨와 계를 맺으면 딱 맞을 기인들이었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소설과 수필을 쓰는 기회가 많았고, 선배들 역시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즐겨 읽으며 신문이 늦게 배달이 되면 “허허, 신문 어디 갔남? 이 사람들이 신문을 제 때 가져와야지.” 라고 안절부절하며 기어이 신문을 찾아 즐겨 읽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선배 한 분은 졸업 무렵에 ‘돌배나무’라는 시집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하숙집 주인은 칠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젊었을 때 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돈을 벌고 능력이 있다 보니 본 부인 외에 두 번째 부인을 얻게 되었고, 큰 부인이 죽고 난 후 부부싸움을 할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말대꾸를 할 때마다 “어허, 왜 그랴. 다 지난 일을 가지고 따지면 뭐혀. 학생들이 듣잖아.” 라고 웃으며 싸움을 피하였다. 그러나 어느 때는 할아버지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심하게 싸우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라고 만류를 하면 대학생들 보기가 민망했던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곤 하였다. 그러면 할머니는 우리를 붙들고 “학생, 내 말 좀 들어봐.” 라고 말하면서 그 동안 억울하게 살았던 과거를 털어놓으며 화를 삭이곤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주에 갈 기회가 적었는데 마침 딸이 공주대학에 입학하여 공주에 갈 기회가 많았다.
한번은 아내와 딸과 셋이서 옛날의 추억을 생각하며 교동에 있는 하숙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삼십 여년 전에 하숙을 했던 학생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옛날 그대로였는데 정원이 있었던 자리에 다른 건물을 지어 옛날의 분위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선배들의 얼굴만 환하게 떠올랐다.
강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스물 두 살의 철없던 대학생이었던 나도 쉬지 않고 나이를 먹어 벌써 육십이 되었다.
하숙집을 나오는데 어딘가에서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가 다정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소관섭/수필가,원광여자고등학교 교장
( 익산문학 22집 발표)

소관섭 선생님이 원여고의 교장으로 부임하셨군요. 축하를 드려야 하겠군요. 저와는 안성에서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소중한 추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