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상했던 바람이 제법 냉기가 더해져 소슬하다. 요사이 나무와 풀잎들은 너도나도 제 몸을 말릴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여름내 진초록을 뽐냈던 푸나무들은 어느새 숙살(肅殺)돼 울긋불긋 단풍이 들거나 갈색으로 변해 있다. 이것을 보면 숙살의 이치는 거스를 수 없는 모양이다. 마침내 낙엽이지고 메마른 풀잎들마저 시들어 스러지면 조락(凋落)이니 영락(零落)이니 하는 표현들이 딱 들어맞는다.
대개 이맘때 사람들은 한번쯤 삶의 가을을 곱씹어 보게 된다. 만일 늦가을 햇살이 실제보다 더 따사롭게 느껴진다면 마음 속 인생의 가을이 깊어졌다는 징표다.
한의학에서는 가을을 숙살의 계절이라고 정의한다. 가을 기운은 쌀쌀하고 매섭다 하여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표현한다. 하필 무시무시한 살(殺)자를 쓴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말 그대로 숙(肅)이란 글자의 뜻처럼 차가움으로 인해 생명이 시들어 죽어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숙살이 모든 초목의 생기를 앗아가 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가을 이전에 이미 열매를 맺은 것은 더 튼실한 열매가 되게 하지만, 가을이 다 되어 열매를 맺으려는 것은 엄정하게 베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모두 다 자양분을 나눠 가져 함께 쭉정이가 되는 것보다 이미 될성부른 것만 알짜배기로 만들자는 선택작용이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이 숙살을 행한다. 놀라운 자연의 이치이다.
윤택한 물기가 있어야 사는 뭇 생명에게, 건조한 가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가을은 겨울을 나고 다음에 오는 봄을 위한 찬찬한 준비기간이다. 하여 영락이나 조락은 덧없는 추락이 아니다. 오히려 앞날을 내다보는 속 깊은 제 살 깎아내기다.
‘영락(零落)’의 ‘零’은 ‘조용히 오는비 령’이다. 따라서 ‘영락’의 문자상 뜻은 ‘조용히 떨어지다’이지만 ‘초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짐’을 일컫는다. 영락은 본래 뜻이 숫자를 나눌 때 딱 맞아 떨어져 나머지가 0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아가 ‘세력이나 살림이 줄어들어 보잘것없이 되다’는 뜻으로 쓰인다.
‘영락없다’라고 하면 ‘조금도 다르지 않고 꼭 같다’라는 뜻이다. 사리가 분명하고 이치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으로 의미상 강조를 할 경우에만 사용된다. 그냥 영락이라고 쓸 경우에는 뜻이 사뭇 달라지므로 주의해야한다. 이런 경우에는 세력이나 사람이 아주 보잘것 없게 된 상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영락’과 ‘영락없다’를 구별해서 써 놓았다. 서로 다른 말이라는 뜻에서다. ‘영락없다’의 어근은 분명히 ‘영락’인데 사전엔 언급이 없다. 왜 ‘영락없다’를 ‘꼭 같다’라는 뜻으로 쓰는지 알 길 없지만, ‘초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짐이 없이 온전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닌가 싶다.
“쇠퇴하여 쓸쓸한 모습은 곧 번성한 속에 있고(衰颯的景象 就在盛滿中), 생장의 움직임은 곧 시들어 버린 속에 있다.(發生的機緘 卽在零落內) 그러므로 군자는 편안한 때에는 마음을 굳게 지킴으로써 후환을 염려해야 하고(故君子居安, 宜操一心以慮患) 어려움을 당해서는 마땅히 굳게 백 번을 참음으로써 성공을 도모해야 하느니라.(處變, 當堅百忍以圖成.)”
채근담의 한 구절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꽃과 잎이 풍성한 계절에 이미 조락의 싹이 움트고 있고, 눈서리 덮인 깊은 겨울에 이미 마른 가지, 시든 풀뿌리에서는 힘차게 생동하는 기운이 새 봄을 마련하고 있다. 자연의 오묘한 섭리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부귀영화를 누릴 때에 이미 비운(悲運)의 씨앗이 뿌려지고, 영락한 역경 속에서도 이미 성공의 싹은 움트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평안 무사할 때에 방자하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후환이 없도록 미리 단속해야 한다. 설사 역경에 처할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굳은 신념으로 미래를 향한 씨앗을 뿌려야 될 일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시들고 떨어져 뒹구는 낙엽처럼 된다. 하지만 조락과 영락의 계절, 자연의 이치에서 간단하면서도 실팍한 교훈 하나 얻었으면 좋겠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