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62> 물고기가 즐거운지 어찌 아는가

어느 날 장자가 혜시(惠子)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그들이 호수의 다리 위에 이르렀다. 장자가 문득 물고기 한 마리가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저 물고기가 아주 즐거운 모양이네그려.”

그러자 혜시가 말했다. “그대는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고기가 즐거워하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장자가 되물었다. “그럼 그대는 내가 아니면서 물고기가 즐거워하는지 내가 모를 거라는 것을 어찌 안다는 말인가?”

혜시가 답했다. “내가 자네가 아닌 이상 자네 생각이 어떤지는 물론 모르지. 그렇지만 그대도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고기가 어떤지는 모를 것 아닌가?”

장자가 말했다. “우리 한번 근본을 따져보세. 방금 자네가 물고기가 즐거워하는지 어찌 아느냐고 물은 것은, 내가 물고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을 자네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겠나? 이 다리 위에 왔을 때 물고기가 자유로이 헤엄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고 생각한 거라네.”

다소 아리송해진다. 혜시가 자기의 전제를 강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결론을 입증하기 어렵다. 장자의 논리적 함정에 빠지는 셈이다. 논점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순관계다. 그래서 이는 우화로 받아들여야 한다. 요는 만물일체의 위치에 서라는 얘기다. 그 경지에 이르면 대상과 나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해지고 자유자재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가르침 아닌가 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홀연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운운한 전직 대통령이 오버랩된다.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뱀은 다리 없이 날고 날다람쥐는 다섯가지 기술을 갖고도 곤궁하다

여기서 뱀은 등사(螣蛇), 곧 운무를 일으켜 몸을 감추고 날아다니는 전설상의 용의 일종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부분에 지렁이와 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지렁이가 손톱이나 이빨도 쓰지 않고 강한 힘줄이나 뼈가 없어도 위로는 더러운 흙을 먹고 아래로는 땅속 물을 마실 수 있는 이유는 그 마음 씀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게는 여덟 개나 되는 다리에다 두개의 집게발이 있지만 뱀과 지렁이의 구멍이 아니면, 자기의 집으로 하지 않는 것은 게의 마음 씀(성질)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굳은 뜻이 없는 자는 밝은 깨우침이 없을 것이며, 묵묵히 일하지 않는 자는 혁혁한 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어서 권학편은 갈림길을 가는 자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고, 두 임금을 섬기는 자는 용납되지 않는다. 두 눈으로 보지 않으면 밝지 못하고, 두 귀로 듣지 않으면 밝을 수 없다. 등사(螣蛇)는 다리가 없지만 날고, 날다람쥐는 다섯 가지 기술이 있지만 궁하다.” 라고 말한다.

시경에 뻐꾸기는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는 일곱이네. 정숙한 사람 군자, 그 거동이 한결 같구나. 그 거동 한결 같으니, 마음이 한결(맺음)같도다. 그러므로 군자는 마음 씀이 한결 같아야 한다.”고 매듭짓는다.

결론적으로 학문이란 중단 없이 정진해야 하며, 군자의 마음은 한결같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여기서 오서오기(鼯鼠五技)’라는 가르침을 배운다. ‘날다람쥐의 다섯 가지 재주는 곧 재주는 많지만 변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의 비유다. , 난다고 해봐야 지붕은 못 넘고, 나무를 기어올라 봐야 타넘지는 못한다. 헤엄을 쳐봐야 좁다란 냇물도 못 건너고, 굴을 파봐야 제 몸 하나 못 감추며, 달릴 줄은 알아도 사람을 앞지를 수는 없다. 그래서 제비한테 두더지한테 먹힌다. 제비보다 못 날고 두더지보다 못 판다는 말이다. 날다람쥐의 다섯 가지 재주는 이것저것 하기는 해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같은 뜻으로 땅강아지 재주란 말도 쓴다, 앞의 날다람쥐처럼 땅강아지란 놈도 날고, 타오르고, 건너가고, 땅을 파고, 달리는, 제법 여러 재주를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이 어설프다. 재주를 갖추긴 갖췄으나 죄다 그만그만하다.

흔히 말이건 글이건 재주건 여러 가지를 다 잘하는 이를 일컬어 팔방미인이라고 한다. 공부는 물론이고 운동도 잘하고 마음도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고 하자. 모두들 부러워하며 닮고 싶어 할 게 뻔하다. 하지만 이처럼 모두 다 갖춘 형 인간은 세상에 그리 흔치 않다. 그저 오지랖만 넓어 여기저기 감 놔라 배 놔라 들러붙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오로지 제집 잔치에 신경 쓰는 사람이 실속을 차린다.

현대 사회는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으로써 모든 분야가 전문화, 분업화됐다.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분야에 걸쳐 숙련되기란 어렵다. 한 분야라도 전문가가 돼야만 능력을 펼 수 있다. 이제는 팔방미인이니 만물박사니 하는 말은 안 통하는 시대다. 도처춘풍 못하는 게 없다는 말은 무능하다는 말이나 같다. 한 우물을 파야 끝내 귀한 물을 얻을 수 있게 마련이다. 공연히 이곳저곳 들쑤셔봐야 헛심만 팽길 뿐이다.

같은 맥락으로 살필 금언도 있다.

말을 많이 하지 마라. 말이 많으면 낭패가 많다. 일을 많이 벌이지 마라. 일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 (無多言, 多言多敗. 無多事, 多事多患.)

그런데 우리나라엔 말 많이 하고 일 많이 벌였던, 그 잘난 정치인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허나 결과는 공허하고 참담할 뿐이었다. 위의 가르침은 <공자가어>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엔 이런 말도 함께한다.

잘 달리는 놈은 날개를 뺏고, 잘 나는 것은 발가락을 줄이며, 뿔이 있는 녀석은 윗니가 없고, 뒷다리가 강한 것은 앞발이 없다. 하늘의 도리는 사물로 하여금 겸하게 하는 법이 없다.”

발이 네 개인 짐승에게는 날개가 없다. 날개가 달린 새는 대신 발이 두 개, 발가락이 세 개다. 소는 윗니가 없다. 토끼는 앞발이 약하다. 발 네 개에 날개까지 달리고, 뿔에다 윗니까지 갖춘 동물은 세상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다시 말해 한서(漢書)어금니를 준 것에는 뿔을 주지 아니하고, 날개를 준 것에는 두 발밖에 주지 않았다 (予齒去角 傅翼兩足)”는 뜻의 말과 통한다. 하늘은 공평하여 어느 하나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일이 없음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하늘이 공평하다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새기지 않으려든다. 한 예를 들어보자.

화광동진(和光同塵)과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판이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화광동진은 자신의 빛을 감추고 남들과 어울린다는 화평의 뜻을 담고 있다. 반면에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는 상대를 이기려고 벼르는 투쟁의 심산이다.

화광동진은 노자 도덕경의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에서 유래했다. 지혜의 빛을 부드럽게 해 속세의 티끌과 함께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덕과 재능을 감추고 세속을 따르고 속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도광양회는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린다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원래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은밀히 힘을 기른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난날 덩샤오핑(鄧小平) 시절 중국의 대외정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된다.

덩샤오핑은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내부적으로 국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는데, 이를 도광양회라고 표현했다. 이런 정책은 당시 서구 열강들에 대항할 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추지 못한 중국의 처지에서 매우 현실적인 방법론이었다. 이후 199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통해 중국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에 오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중국 남북조 때 양나라 소통(蕭統)이 지은 책 정절선생집서(靖節先生集序)’에는 성인은 빛을 감추고 현인은 속세를 피한다”(聖人韜光 賢人遁世)는 말이 나온다. 소통은 바로 역대 명문 모음집 문선(文選)’을 편찬한 소명태자다.

또 금()나라 때 마옥(馬鈺)만정방(滿庭芳)’과 수서(隋書)설도형(薛道衡)에도 각각 빛을 감추고 실체를 숨긴다’(韜光隱迹), ‘마음을 감추고 종적을 드러내지 않는다’(韜神晦迹)는 표현이 있다.

이런 표현들은 오늘날 프로는 주장을 하지만 아마는 주저를 한다는 시쳇말과는 영 딴판이다. 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 아니고 속됨의 끝이며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을까. 모두가 그 시대 시속과 흐름에 따른 것이겠지만 동양식 사고와 출처진퇴의 결과로 보인다. 곧 다른 사람의 우러름을 받는 이라면 마땅히 주변과 이웃, 나라의 고통과 곤경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함께 아파해야한다는 뜻 말이다.

()대의 유명한 매판(買辦) 정관응(鄭觀應)의 베스트셀러 성세위언(盛世危言)’의 머리말에도 도광양회가 나온다. 매판은 1770년 무렵부터 중국에 설치된 외국 상관(商館)과 영사관 등이 중국 상인과의 거래중개를 맡기기 위해 고용한 중국인을 말한다. 정관응은 매판 생활을 청산한 뒤 중국의 부강을 위해 상전(商戰)의 방략을 연구하는 데 주력했다. 책의 핵심은 강해야 모욕당하지 않는다는 도강어모(圖强御侮)와 부강구국(富强救國)이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래 기미(羈縻) 정책을 표방해왔다. 굴레를 씌워 얽어매듯 주변국을 통제하는 정책이다. 그러다가 덩샤오핑이 1980년대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부터 도광양회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제력과 국력이 생길 때까지 침묵을 지키면서 강대국들에 전술적으로 협력하는 외교정책이다.

동양사회는 노인이 존경받고 우러름을 받는 사회다. 동양에서 지혜로운 네 노인의 집단지성을 가리키는 말이 상산사호(商山四皓). 그냥 사호(四皓)라고도 한다. ()는 희다, 깨끗하다는 뜻과 함께 노인이란 뜻도 있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甪里)선생, 네 노인은 상산(商山)으로 들어갔다.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었기에 상산사호라고 불렸던 네 노인은 영지버섯 등을 따먹으며 살았다.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했을 무렵에는 이 네 어른은 이미 천하에 현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래서 한() 고조 유방이 사호를 불렀으나 네 노인은 자지가(紫芝歌)’를 부르며 거절했다. 자줏빛 버섯(紫芝)이란 선가(仙家)에서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치던 영지버섯을 가리킨다.

한 고조는 여후(呂后)의 아들 유영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척부인(戚夫人)을 총애하게 되자 척부인의 소생인 유여로 갈아치우려고 마음먹었다. 여후, 즉 여태후가 나중에 척부인의 손발을 잘라 인체(人彘 사람돼지)로 만들었던 비극의 단초가 이 태자 교체 기도에서 시작된다. 다급해진 여후는 유방의 모사(謀士) 장량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장량의 계책은 뜻밖에도 사호를 극진한 예로 불러서 태자의 곁에 두라는 내용이었다.

태자가 공손하게 서찰을 써서 올리자 세상으로 나온 사호는 태자를 보좌했다. 이 모습을 본 유방은 척부인을 불러 내가 태자를 바꾸려고 했으나 저 네 노인이 태자를 보좌해서 이미 우익(羽翼)이 되었으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라며 태자 교체를 포기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산인권주(山人勸酒)’에서 푸르고 푸른 높은 소나무, 가지 축축 늘어진 아름다운 늙은이들갑자기 일어나 태자를 보좌했네, 한왕이 이에 다시 놀라서, 척부인을 돌아보고, 저 노인들이 우익(羽翼)을 이루었구나 라고 말했네라고 이 고사를 시로 읊었다.

장량은 한 고조 유방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주었는데, 자신이 해결사로 나선 것이 아니라 네 노인의 지혜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역시 명참모였다.

걸언돈사(乞言敦史)라는 말이 있다. 유교 사회에서 이상으로 삼는 하()()()의 삼왕(三王) 때는 노인을 모시고 양로연(養老燕)을 베풀었는데, 이때 노인들에게 좋은 말(善言)을 들려달라고 요청해서 돈사(敦史)로 삼았다고 한다. 돈사란 두터운 덕을 기록한 역사서를 뜻한다.

그만큼 노인들의 경륜과 식견을 높이 샀다는 얘기다. 오늘날 실버는 노인들을 향해 그저 예의상 붙여주는 경칭이 아니다. 이미 커다란 흐름이며 그 존재와 역량을 인정해야하는 당연의 문제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존중의 움직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 땅에 협잡과 기만이 어지럽게 춤춘다. 세상을 홀리게 하고 국민을 눈속임하는 야바위꾼과 정상모리배들이 설쳐댄다. 때문에 나라는 어지럽고 국민은 도탄 속에서 신음중이다. 이런 난세에 성인과 현자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어디에 숨어 빛을 감추는가(和光). 하다못해 거벽(巨擘)과 원로들은 왜 경륜과 지혜를 풀지 않고 입을 다물고(韜光) 있는가.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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